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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왜 영국식 해상제국이 되지 못했나, 콜베르·해군·동인도회사의 17세기 제국 구상

형성하다2026. 5. 24.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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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약해서 영국에 밀린 것이 아니라, 유럽 대륙전쟁과 해상제국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바다에 모든 힘을 걸 수 없었다.

콜베르는 해군과 조선소, 프랑스 동인도회사, 식민지 무역망을 묶어 프랑스를 해상제국으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국은 대서양과 인도양으로 나가면서도 라인강 유역, 이탈리아반도,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일대의 저지대 해안권, 피레네산맥 너머 스페인 문제를 놓을 수 없었다.

최종 업데이트 2026-05-24

대항해시대와 해상제국 연작
프랑스 제국은 왜 영국에 밀렸나, 콜베르·해군·동인도회사가 만든 해상제국의 한계

프랑스는 바다를 몰라서 실패한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큰 인구와 농업 기반, 강한 왕권과 육군을 가진 나라였다. 문제는 바로 그 강함이었다. 프랑스는 대륙 최강국의 무게를 안은 채 해상제국까지 만들려 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유럽은 같은 방식으로 바다에 나가지 않았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을 때, 유럽 국가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반응한 것은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리스본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내려갔고,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갔다. 스페인은 카리브해와 멕시코, 페루, 필리핀 마닐라를 연결하며 대서양과 태평양을 묶었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정리해 놓은 바다의 틈새에서 중계무역과 금융을 키웠고, 영국은 항해법과 해군, 국채, 영국은행, 동인도회사를 하나의 전쟁 시스템으로 묶었다.

프랑스는 이 흐름 속에서 가장 복잡한 위치에 있었다. 프랑스도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브르타뉴반도와 노르망디, 라로셸, 보르도, 마르세유는 이미 바다를 바라보는 항구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단순한 해안국가가 아니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 서부 한복판의 거대한 왕국이었다. 북쪽으로는 플랑드르와 브라반트, 홀란트와 질란트가 이어지는 저지대 해안권, 동쪽으로는 라인강 유역과 독일 제후국, 남쪽으로는 피레네산맥 너머 스페인 왕국과 이탈리아반도 문제가 있었다.

포르투갈은 비교적 작은 왕국이었기에 바다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안트베르펜을 잇는 북해·라인강 하구 상업권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상업과 금융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영국은 브리튼섬이라는 지리 덕분에 해군을 본토 방어와 해외 팽창의 공통 도구로 삼을 수 있었다. 프랑스는 달랐다. 프랑스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유럽 대륙의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없었다.

프랑스는 바다를 모른 나라가 아니라, 유럽 대륙을 떠날 수 없었던 초강대국이었다.

프랑스는 왜 대륙을 포기할 수 없었나

프랑스의 지정학은 영국과 완전히 달랐다. 영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놓인 브리튼섬을 중심으로 북해, 잉글랜드 해협, 대서양을 바라보는 나라였다. 침공 위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해군을 잘 유지하면 본토 방어와 해외 진출을 같은 방향으로 묶을 수 있었다. 영국에서 해군은 방패이면서 칼이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 서부의 큰 왕국이었다. 북쪽에는 플랑드르와 브라반트가 있었다. 플랑드르와 브라반트는 오늘날 벨기에 북부와 네덜란드 남부 일부에 걸친 역사권역으로, 중세부터 직물업과 도시경제가 발달한 곳이었다. 더 넓게는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일대를 저지대 해안권, 즉 Low Countries라고 부른다. 이곳은 바다와 강, 항구와 상업도시가 겹친 곳이었고, 프랑스·스페인·신성로마제국·네덜란드 공화국이 계속 충돌한 전장이었다.

동쪽에는 알자스와 로렌, 라인강 유역의 독일 제후국들이 있었다. 라인강 유역은 오늘날 프랑스 동부, 독일 서부, 스위스 북부, 네덜란드로 이어지는 큰 강의 정치·군사권역이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곳이 동부 국경 문제였다. 남쪽에는 피레네산맥 너머 스페인 왕국이 있었고, 남동쪽에는 사부아와 북이탈리아, 더 넓게는 이탈리아반도의 권력 문제가 있었다.

1494년부터 이어진 이탈리아 전쟁은 프랑스가 이미 15세기 말부터 유럽 대륙 권력정치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밀라노, 나폴리, 베네치아, 교황령, 합스부르크 왕가가 얽힌 이탈리아반도는 단순한 남쪽 전장이 아니었다. 지중해 무역과 교황권, 합스부르크 세력과 프랑스 왕권이 부딪히는 정치무대였다. 프랑스 왕은 대서양만 볼 수 없었다.

프랑스의 한계는 약함이 아니라 과중함이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영국처럼 해군과 해외회사에 국가 역량을 끝까지 몰아넣기 어려웠다.

프랑스가 영국식 해상제국이 되지 못한 이유는 바다를 몰라서가 아니라, 대륙 전쟁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리슐리외와 콜베르 이전에도 프랑스는 바다를 보았다

프랑스의 해외 진출은 루이 14세와 콜베르 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1534년 자크 카르티에가 생로랑 강 하구 일대를 탐사하며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진출이 시작됐다. 생로랑 강은 오늘날 캐나다 동부 퀘벡주를 지나 대서양으로 나가는 큰 강이다. 프랑스는 이 강을 통해 내륙으로 들어가 모피 교역과 원주민 동맹, 가톨릭 선교망을 넓혔다.

1608년 사뮈엘 드 샹플랭은 퀘벡을 세웠다. 퀘벡은 오늘날 캐나다 퀘벡주의 중심 도시이며, 뉴프랑스의 행정·군사·교역 거점이 되었다. 이때 프랑스가 본 북아메리카는 영국의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처럼 대규모 농업 이민지가 아니었다. 프랑스의 북아메리카는 생로랑 강, 오대호, 미시시피 강으로 이어지는 강줄기와 교역로의 세계였다.

17세기 전반의 리슐리외 추기경도 해군과 해외회사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왕권을 강화하고, 해상활동과 무역회사를 장려하려 했다. 1627년에는 백인회사, 즉 누벨프랑스 회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의 내부 사정은 안정적이지 않았다. 종교 갈등, 귀족 반란, 재정 문제, 유럽 전쟁이 계속되면서 해외 정책은 꾸준히 밀고 나가기 어려웠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프랑스는 바다로 나갈 능력이 없던 나라가 아니었다. 항해자도 있었고, 항구도 있었고, 북아메리카 거점도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해양정책은 자주 강하게 출발했다가도 파리의 왕실 재정, 귀족정치, 종교분쟁, 유럽 대륙전쟁 앞에서 끊기거나 약해졌다. 해외 거점은 있었지만, 그 거점을 계속 지킬 해군과 금융과 인구 이주의 두께가 충분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해외 진출 자체가 늦었던 나라가 아니라, 해외 진출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일 국가 구조가 흔들린 나라였다.

콜베르는 프랑스를 해군국가로 바꾸려 했다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 해상제국 구상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재정총감으로서 제조업, 세금, 무역, 관세, 국가재정을 손봤고, 해군장관으로서 왕립 해군과 항구, 조선소, 상선을 키우려 했다. 콜베르의 목표는 단순히 배를 몇 척 더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가 네덜란드 상인에게 운송과 중계 이익을 빼앗기지 않고, 프랑스 배로 프랑스 상품을 운반하며, 프랑스 식민지와 프랑스 시장을 직접 연결하는 구조를 만들려 했다.

이 정책은 중상주의, 즉 국가가 제조업·해운·무역을 통제하고 보호해 금은과 세수를 늘리려는 경제정책과 연결된다. 콜베르는 프랑스가 암스테르담 상인과 네덜란드 선박에 너무 의존한다고 보았다. 프랑스 상품을 프랑스가 만들고, 프랑스 배가 실어 나르며, 프랑스 회사가 해외에서 이익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군은 군사기관이면서 동시에 경제정책의 도구였다.

콜베르가 키운 것은 전투함만이 아니었다. 브레스트는 프랑스 서북부 브르타뉴반도 끝의 대서양 해군 거점이었다. 툴롱은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해군 거점이었다. 로슈포르는 프랑스 서부 샤랑트강 하구 쪽에 세운 조선·해군 행정 도시였고, 로리앙은 브르타뉴 남부 대서양 연안에서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깊게 연결된 항구였다. 콜베르는 항구, 조선소, 해군 행정, 상선을 하나의 정책 안에서 보려 했다.

프랑스에게 지중해는 마르세유와 툴롱, 이탈리아반도, 오스만 제국과 연결되는 바다였다. 대서양은 보르도·낭트·라로셸·브레스트에서 카리브해와 북아메리카로 나가는 바다였다. 프랑스는 두 바다를 모두 가졌지만, 바로 그 때문에 부담도 컸다. 지중해 함대와 대서양 함대, 상선과 전투함, 유럽 전쟁과 식민지 무역을 동시에 돌려야 했다.

콜베르의 해상정책은 배를 늘리는 사업이 아니라, 프랑스 왕국을 해군·상선·회사·식민지가 연결된 국가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왜 영국 동인도회사처럼 되지 못했나

1664년 콜베르는 프랑스 동인도회사를 만들었다. 이 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VOC와 영국 동인도회사에 맞서기 위한 특허회사였다. 이름만 보면 프랑스도 영국과 비슷한 길을 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제 작동 방식은 달랐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런던 상인과 투자자의 힘이 강했고, 시간이 흐르며 국가와 결합하면서도 회사의 상업적 자율성이 상당했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처음부터 국가 주도와 왕실 후원의 성격이 더 강했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프랑스 상인들은 암스테르담·로테르담의 네덜란드 상인이나 런던 시티의 영국 상인들처럼 적극적으로 위험을 떠안지 않았다. 콜베르는 상인들을 설득하고 압박해 회사를 키우려 했지만, 회사는 자본과 경험, 항해망, 민간 투자 열기에서 경쟁자보다 약했다. 국왕이 회사를 만들 수는 있었지만, 상인사회 전체가 그 회사를 자기 사업처럼 떠받쳐야 했다. 프랑스에서는 그 힘이 충분히 두껍지 않았다.

그래도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수라트는 오늘날 인도 구자라트주의 서해안 항구였고, 마술리파트남은 오늘날 인도 안드라프라데시주의 코로만델 해안 항구였다. 퐁디셰리, 오늘날 푸두체리는 인도 남동부 타밀나두 해안의 프랑스 거점이 되었고, 샹데르나고르, 오늘날 찬다나가르는 벵골 지방 후글리강 유역의 프랑스 무역소였다. 프랑스는 이 거점들을 통해 인도양과 인도 아대륙의 무역질서에 들어갔다.

다만 17세기 말까지의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아직 영국 동인도회사처럼 제국의 대리기관으로 굳어지지 못했다. 프랑스 회사는 왕권의 후원으로 출발했지만, 상업사회 전체의 투자 열기와 장기 운영 능력은 약했다. 프랑스의 힘은 컸지만 그 힘은 유럽 전쟁, 왕실 재정, 육군 유지, 궁정 정치, 해군 건설 사이에서 계속 나뉘었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제국의 도구가 될 가능성을 가졌지만, 영국처럼 민간자본·해군·국가신용이 두껍게 결합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식민지는 넓었지만, 선과 점으로 이어진 제국이었다

프랑스의 해외세계는 결코 작지 않았다. 북아메리카에는 뉴프랑스가 있었다. 뉴프랑스는 오늘날 캐나다 퀘벡주와 온타리오 일부, 오대호 주변, 미국 중부의 미시시피 강 유역, 멕시코만 북쪽 루이지애나 권역까지 이어진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영향권이었다. 지도만 보면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내륙을 거대한 활처럼 붙잡은 듯 보인다. 그러나 실제 인구와 정착 밀도는 영국의 13개 식민지보다 훨씬 낮았다.

뉴프랑스의 힘은 농업 인구의 대규모 이주보다 강과 모피, 원주민 동맹, 요새, 선교망에서 나왔다. 프랑스인은 생로랑 강과 오대호, 미시시피 강을 따라 움직였고, 강줄기와 내륙 교역로를 통해 영향력을 넓혔다. 이 방식은 넓은 지도를 만들 수 있었지만, 영국식 인구 식민지와 충돌할 때 약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버지니아, 매사추세츠, 펜실베이니아, 뉴욕 같은 대서양 연안 식민지는 인구와 농장, 항구와 지방자치를 두껍게 쌓아 갔다.

카리브해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는 오늘날에도 프랑스 해외영토로 남아 있는 카리브해 섬이고, 생도맹그는 오늘날 아이티가 있는 히스파니올라섬 서부의 프랑스 식민지였다.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으로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가 더 분명해졌고, 이후 생도맹그는 프랑스 카리브해 식민경제의 핵심으로 커진다. 그러나 그 부는 노예노동과 플랜테이션 체제 위에 세워졌다.

인도양과 인도에서는 퐁디셰리와 샹데르나고르가 프랑스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인도 거점은 북아메리카나 카리브해처럼 넓은 영토 식민지가 아니었다. 무역소, 요새, 외교적 영향력, 현지 정치 개입이 결합한 형태였다.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의 강, 카리브해의 설탕섬, 인도의 무역거점을 동시에 가졌지만, 이 모든 것을 한 방향으로 밀어붙일 안정적 해군·금융 구조가 부족했다.

프랑스의 해외제국은 작지 않았지만, 영국처럼 인구·해군·금융·회사가 한 덩어리로 굳어진 제국은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는 해군만이 아니라 국가 운영 방식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를 단순히 “영국은 해군, 프랑스는 육군”으로만 말하면 부족하다. 프랑스도 강한 해군을 만들 수 있었다. 루이 14세 시기 프랑스 해군은 한때 유럽 최상위권의 전력을 갖췄다. 문제는 지속성이었다. 해군은 한 번 키우는 것보다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전함은 수리해야 하고, 선원은 훈련해야 하며, 항구와 조선소는 끊임없이 돈을 요구한다.

영국은 의회, 국채, 런던 금융시장, 해군 행정, 동인도회사를 결합해 장기전을 감당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었다. 1694년 영국은행 설립은 그 흐름의 중요한 장면이었다. 빚은 위험이었지만, 동시에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도구였다. 영국은 국가신용을 통해 미래 세금을 현재 전쟁비용으로 끌어왔다. 이 구조가 완전하거나 도덕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오래 버티는 데는 매우 강했다.

프랑스는 왕권이 강했지만, 재정 구조는 더 취약했다. 왕실 권위가 강하다고 해서 국가신용이 자동으로 안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 특권, 성직자 특권, 조세 불균형, 지방 관습, 전쟁비용, 궁정 지출, 대륙 육군 유지비가 얽혔다. 프랑스는 큰 나라였지만, 큰 나라였기 때문에 돈도 더 많이 필요했다. 해군과 식민지에 투자하려면, 먼저 유럽 대륙의 전쟁을 견뎌야 했다.

영국의 구조 브리튼섬의 지리, 해군 중심 전략, 의회 조세, 국채, 런던 금융, 동인도회사가 비교적 같은 방향으로 묶였다.
프랑스의 구조 강한 왕권과 육군, 넓은 농업 기반, 큰 인구를 가졌지만 라인강 유역, 이탈리아반도, 저지대 해안권, 스페인 전선을 동시에 신경 써야 했다.
영국 회사의 힘 런던 상인·투자자·국가가 위험과 이익을 나누며 회사가 점차 제국의 대리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프랑스 회사의 한계 국가 주도와 왕실 후원이 강했지만 민간 투자층과 자율적 상업 기반이 상대적으로 얇아 장기 경쟁에서 불리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는 배의 숫자보다, 전쟁비용을 얼마나 오래 제도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너무 많은 전장을 가졌다

루이 14세는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으로 끌어올린 왕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단순한 사치의 공간이 아니라 귀족을 왕권 주변에 묶어 두는 정치 장치였다. 프랑스 육군은 강했고, 프랑스 문화는 유럽 궁정의 표준처럼 퍼졌다. 그러나 이 강함은 비용을 요구했다. 대륙전쟁은 해상제국을 갉아먹었다.

프랑스는 북쪽으로 네덜란드 공화국과 스페인령 네덜란드, 즉 오늘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중심의 남부 저지대 해안권과 부딪혔다. 동쪽으로는 라인강 유역의 독일 제후국들과 신성로마제국, 남쪽으로는 스페인 왕국과 이탈리아반도 문제를 마주했다. 프랑스가 어디 한 곳만 보며 움직일 수 없는 구조였다.

1688년부터 1697년까지 이어진 대동맹전쟁은 그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 전쟁은 프랑스의 팽창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 네덜란드 공화국,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등이 맞선 전쟁이었다. 프랑스는 플랑드르와 라인강 유역, 이탈리아, 카탈루냐, 대서양과 식민지 해역까지 신경 써야 했다. 프랑스군은 강했지만, 전장이 너무 많았다.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은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유럽 전체를 마음대로 누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프랑스는 여전히 강대국이었지만, 네덜란드·영국·합스부르크가 결합한 균형전략 앞에서 계속 확장하기 어려웠다. 이 무렵 영국은 해군과 금융을 더욱 강하게 묶고 있었고, 프랑스는 왕권과 육군, 해군과 회사, 대륙전쟁과 해외진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프랑스 해상제국의 한계는 콜베르의 구상이 약해서가 아니라, 루이 14세의 유럽 패권전쟁이 너무 컸기 때문에 생겼다.

1699년 전후, 프랑스의 해상제국 구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699년 전후의 프랑스를 보면, 이 나라는 아직 실패한 제국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능성이 컸다. 프랑스는 뉴프랑스의 강줄기를 따라 북아메리카 내륙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카리브해 섬에서는 설탕 경제가 커지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퐁디셰리와 샹데르나고르 같은 거점을 통해 영국·네덜란드와 같은 바다에 서기 시작했다. 콜베르의 제도는 이미 만들어졌고, 해군과 항구도 성장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한계도 뚜렷했다. 프랑스의 해외 거점은 넓게 퍼져 있었지만, 그 거점을 하나로 묶는 힘은 영국보다 약했다. 영국은 섬나라 방어와 해외 팽창을 해군으로 묶을 수 있었고, 금융과 국채를 통해 전쟁비용을 장기적으로 조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프랑스는 여전히 왕실 재정과 대륙 육군에 큰 돈을 써야 했다.

그래서 1699년 전후의 프랑스는 결론이 아니라 갈림길에 서 있었다. 바다로 나갈 능력은 충분했다. 해군도 만들었고, 회사도 세웠고, 식민지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처럼 해군·금융·회사·국가신용을 한 방향으로 몰아붙일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 질문의 답은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18세기 중반 7년전쟁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1699년 전후의 프랑스는 패배한 나라가 아니라, 해상제국으로 갈 수 있었지만 대륙강국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한 나라였다.

연도로 보면 프랑스의 기회와 한계가 함께 보인다

프랑스 제국의 흐름은 연도를 붙이면 더 정확히 보인다. 프랑스는 바다로 나가지 않은 나라가 아니라, 여러 번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매번 유럽 대륙의 전쟁, 재정 문제, 회사의 자본 부족, 인구 식민지의 약함이 발목을 잡았다. 아래 연표는 프랑스가 해상제국으로 올라설 기회와 그 한계가 어떻게 함께 나타났는지를 보여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며 동지중해 질서가 바뀌었다. 유럽 국가들은 지중해와 육상 교역의 압박 속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바다를 보게 됐다.
1494년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됐다. 프랑스는 밀라노, 나폴리, 교황령, 베네치아, 합스부르크 세력과 얽히며 유럽 대륙 권력정치에 깊숙이 들어갔다.
1534년 자크 카르티에가 생로랑 강 하구를 탐사했다. 오늘날 캐나다 퀘벡주 일대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진출이 시작됐다.
1608년 사뮈엘 드 샹플랭이 퀘벡을 세웠다. 프랑스는 생로랑 강을 중심으로 뉴프랑스의 실제 거점을 만들었다.
1627년 리슐리외 시기 누벨프랑스 회사가 만들어졌다. 프랑스 왕권은 북아메리카와 해상무역을 국가정책의 영역으로 보기 시작했다.
1664년 콜베르가 프랑스 동인도회사를 세웠다. 프랑스는 영국·네덜란드 회사에 맞서 인도양과 아시아 무역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려 했다.
1669년 콜베르는 해군 행정의 핵심 책임자가 되어 전투함, 조선소, 항구, 상선을 키우려 했다. 브레스트, 툴롱, 로슈포르, 로리앙이 이 흐름과 연결된다.
1670년대 퐁디셰리, 오늘날 인도 푸두체리가 프랑스 인도 거점으로 자리 잡아 갔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인도 무역망 안에 자기 자리를 만들려 했다.
1688년~1697년 대동맹전쟁이 이어졌다. 프랑스는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령 네덜란드, 라인강 유역, 이탈리아, 해상전선을 동시에 신경 써야 했다.
1694년 영국은행이 세워졌다. 영국은 전쟁비용을 국채와 금융으로 장기 조달하는 방향을 강화했고, 이는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큰 차이를 만들었다.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으로 대동맹전쟁이 끝났다. 프랑스는 여전히 강했지만, 유럽 연합세력의 균형전략 앞에서 무제한 팽창은 어려워졌다.
1699년 전후 프랑스는 아직 해상제국의 가능성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대륙전쟁과 해외진출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구조적 부담은 이미 선명해져 있었다.

프랑스는 여러 번 바다로 나갔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유럽 대륙전쟁과 재정 부담이 해상제국의 지속성을 약화시켰다.

프랑스는 실패한 제국인가, 다른 종류의 제국인가

프랑스 제국을 단순히 실패한 해상제국으로만 보면 절반만 보는 것이다. 1699년 전후의 프랑스는 무너진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였고, 해군과 회사, 식민지 거점도 갖고 있었다. 문제는 프랑스가 영국식으로 바뀌기 어려운 나라였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섬나라가 아니었고, 상업공화국도 아니었고, 포르투갈처럼 국가 역량을 한 항로에 몰아넣을 수 있는 작은 왕국도 아니었다.

프랑스는 대륙강국이었다. 이 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다. 프랑스는 강했기 때문에 더 많은 전선을 떠안았다.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령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왕국, 이탈리아반도, 대서양, 지중해, 북아메리카, 카리브해, 인도양을 동시에 의식해야 했다. 제국의 야망은 컸지만, 그 야망을 떠받칠 제도는 영국보다 덜 한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글의 핵심은 “프랑스는 왜 못했나”가 아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프랑스는 왜 영국처럼 하지 못했나”다. 프랑스는 바다로 나갈 능력도, 사람도, 전략가도, 회사도 가졌다. 다만 영국처럼 해군·금융·회사·국가신용을 한 방향으로 오래 밀어붙이기에는 유럽 대륙의 부담이 너무 컸다.

프랑스는 제국이 되지 못한 나라가 아니라, 영국식 해상제국으로 끝까지 전환하기 어려웠던 대륙강국이었다.

인명·지명 박스형 사전

저지대 해안권, Low Countries 오늘날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일대를 가리키는 북서유럽 해안권역이다. 라인강·마스강·스헬더강 하구가 얽힌 상업·항구·직물 도시권이었고, 프랑스·스페인·신성로마제국·네덜란드 공화국의 충돌 지대였다.
스페인령 네덜란드, Spanish Netherlands 16~18세기 초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한 남부 저지대 해안권이다. 대체로 오늘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프랑스 북부 일부와 연결된다. 프랑스 북부 안보와 네덜란드·스페인·합스부르크 경쟁의 핵심 전장이었다.
네덜란드 공화국, Dutch Republic 오늘날 네덜란드의 전신에 해당하는 17세기 상업공화국이다.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중계무역, 금융, 해상보험, 동인도회사 VOC를 발전시켰고 프랑스와 영국 모두에게 경쟁자이자 학습 대상이었다.
플랑드르·브라반트, Flanders·Brabant 오늘날 벨기에 북부와 네덜란드 남부 일부에 걸친 역사권역이다. 중세부터 직물업과 도시경제가 발달했고, 프랑스 왕국 북쪽 국경과 맞닿아 유럽 전쟁의 단골 전장이 되었다.
라인강 유역, Rhine basin 오늘날 독일 서부와 프랑스 동부, 스위스, 네덜란드로 이어지는 큰 강 유역이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알자스·로렌과 독일 제후국을 마주하는 동부 국경 문제였고, 유럽 대륙전쟁의 핵심 축이었다.
피레네산맥, Pyrenees 오늘날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놓인 산맥이다. 프랑스 남서쪽 국경의 자연 장벽이었지만, 스페인 왕국과의 전쟁과 왕위 계승 문제를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했다.
이탈리아반도, Italian Peninsula 오늘날 이탈리아가 있는 반도다. 15~16세기에는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교황령 등 여러 세력이 나뉘어 있었고, 프랑스·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가 계속 개입한 유럽 권력정치의 무대였다.
장바티스트 콜베르, Jean-Baptiste Colbert 루이 14세 시대의 재정총감이자 해군 행정의 핵심 책임자다. 제조업, 관세, 무역회사, 조선소, 해군을 묶어 프랑스를 중상주의 해군국가로 바꾸려 했다.
루이 14세, Louis XIV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적 군주다.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으로 끌어올렸지만, 대륙전쟁과 베르사유 중심의 왕권 운영은 해상제국 전략에 큰 재정 부담을 남겼다.
리슐리외, Cardinal Richelieu 루이 13세 시대의 추기경이자 정치가다. 프랑스 왕권 강화와 해군·해외회사 육성의 필요성을 일찍 본 인물이다. 콜베르 이전 프랑스 해양정책의 전 단계로 볼 수 있다.
자크 카르티에, Jacques Cartier 1534년 생로랑 강 하구를 탐사한 프랑스 항해가다.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진출과 뉴프랑스 형성의 출발점에 있는 인물이다.
사뮈엘 드 샹플랭, Samuel de Champlain 1608년 퀘벡을 세운 프랑스 탐험가다. 생로랑 강을 중심으로 한 뉴프랑스의 실제 거점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뉴프랑스, New France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권역이다. 오늘날 캐나다 퀘벡 일대, 생로랑 강, 오대호, 미시시피 강 유역, 루이지애나까지 이어지는 넓은 영향권을 가졌지만 인구 정착은 영국 식민지보다 훨씬 얇았다.
퀘벡, Quebec 현재 캐나다 퀘벡주의 중심 도시다. 1608년 프랑스 거점으로 세워졌고, 뉴프랑스의 행정·군사·교역 중심지 역할을 했다. 오늘날 캐나다 프랑스어권 정체성과도 깊게 연결된다.
생로랑 강, St. Lawrence River 캐나다 동부에서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큰 강이다. 뉴프랑스의 생명선이었다. 프랑스는 이 강을 통해 내륙으로 들어가 모피 교역과 선교, 원주민 동맹을 넓혔다.
루이지애나, Louisiana 미시시피 강 유역과 멕시코만 북쪽으로 이어진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권역이다. 오늘날 미국 루이지애나주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 쓰였다. 17세기 말에는 아직 가능성의 공간이었고, 18세기 이후 프랑스 북아메리카 전략의 큰 축이 된다.
생도맹그, Saint-Domingue / 아이티, Haiti 히스파니올라섬 서부의 프랑스 식민지였고, 오늘날 아이티에 해당한다. 17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카리브해 식민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커졌고, 이후 18세기에는 가장 부유한 설탕 식민지 중 하나가 된다.
마르티니크·과들루프, Martinique·Guadeloupe 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 섬들이다. 설탕 플랜테이션과 대서양 무역에서 중요했다. 프랑스가 북아메리카 대륙보다 카리브해 섬의 경제가치를 더 중시하게 되는 배경과 연결된다.
퐁디셰리, Pondicherry / 푸두체리, Puducherry 현재 인도 남동부 타밀나두 해안의 도시다. 프랑스령 인도의 대표 거점이 된다. 코로만델 해안 무역과 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인도 활동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지명이다.
샹데르나고르, Chandernagore / 찬다나가르, Chandannagar 현재 인도 서벵골주 후글리강변의 도시다. 프랑스의 벵골 무역 거점이었다. 벵골만과 갠지스 하구 무역망에서 프랑스가 차지하려 했던 자리를 보여준다.
브레스트·툴롱, Brest·Toulon 브레스트는 프랑스 서북부 대서양 해군 거점이고, 툴롱은 남부 지중해 해군 거점이다. 프랑스는 대서양과 지중해를 동시에 신경 써야 했고, 이 이중 부담은 영국과 다른 조건을 만들었다.
로슈포르·로리앙, Rochefort·Lorient 로슈포르는 콜베르 시기 해군 조선·행정 거점으로 중요했고, 로리앙은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깊게 연결된 항구다. 프랑스가 해군과 회사형 무역을 함께 키우려 했음을 보여주는 지명이다.
대동맹전쟁, War of the Grand Alliance 1688년부터 1697년까지 이어진 루이 14세 프랑스와 유럽 연합세력의 전쟁이다. 잉글랜드, 네덜란드 공화국,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등이 프랑스의 팽창을 견제했다. 프랑스가 해상제국과 대륙전쟁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던 구조를 보여준다.
레이스베이크 조약, Treaty of Ryswick 1697년 대동맹전쟁을 끝낸 조약이다. 프랑스는 여전히 강대국이었지만, 유럽 연합세력의 균형전략 앞에서 무제한 팽창은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마무리

프랑스 제국은 영국에 밀렸지만, 그것을 단순한 무능으로 보면 역사를 잘못 읽게 된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였고, 루이 14세 시대에는 육군과 문화, 왕권, 재정 동원력에서 막강했다. 콜베르는 그 힘을 바다로 돌리려 했다. 해군을 키우고, 조선소를 세우고, 프랑스 동인도회사를 만들고, 프랑스 상선과 식민지를 연결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과 달랐다. 영국은 브리튼섬이라는 조건을 해군과 금융으로 묶을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대륙전쟁을 떠날 수 없었다. 프랑스 왕국의 안전은 라인강 유역, 피레네산맥, 저지대 해안권, 이탈리아반도, 스페인 왕권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바다에서 싸우면서도 언제나 육지에서 가장 큰 돈과 병력을 써야 했다.

1699년 전후의 프랑스는 아직 패배한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해상제국으로 갈 수 있는 많은 재료를 갖고 있었다. 다만 그 재료들은 한 방향으로 묶이지 못했다. 해군은 컸지만 유지비가 컸고, 회사는 있었지만 민간자본의 두께가 약했으며, 식민지는 넓었지만 인구와 보급망이 얇았다. 프랑스의 제국 구상은 강했지만, 영국식 해상금융국가로 굳어지기에는 구조가 달랐다.

이후 18세기에 들어서면 이 차이는 더 큰 전쟁으로 드러난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전쟁을 거치며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은 북아메리카와 인도양에서 폭발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17세기 후반, 콜베르의 해군과 동인도회사, 루이 14세의 대륙전쟁 속에서 프랑스 해상제국의 가능성과 한계는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프랑스는 약해서 영국에 밀린 것이 아니라, 대륙 최강국의 무게를 안은 채 해상제국까지 감당하려 했기 때문에 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