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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군대가 없어서 망한 게 아니다, 신식군을 일본군 지휘 아래 세운 비극

형성하다2026. 6. 9.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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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조선군의 몰락

조선은 군대가 없어서 망한 게 아니다, 신식군을 일본군 지휘 아래 세운 비극

조선 말의 비극은 백성과 군인이 싸우지 않았다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조선에는 신식군도, 장교도, 무기도 있었다. 문제는 그 군대를 나라 지키는 힘으로 묶지 못하고 백성 진압과 외세 지휘 아래 세웠다는 데 있다.

조선 말의 몰락을 두고 흔히 이런 질문이 나온다. 왜 백성은 더 일찍 싸우지 않았는가. 왜 군대는 나라가 무너지기 전에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는가. 얼핏 보면 날카로운 질문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질문은 조선 말의 실제 비극을 너무 쉽게 잘라낸다. 당시의 핵심은 군대가 없었느냐가 아니었다.

조선에는 군대가 있었다. 총도 있었고, 탄약도 있었고, 신식 훈련을 받은 장교와 병사도 있었다. 미국인 교관을 불러 장교를 길러내려 한 연무공원도 있었고, 장위영과 통위영 같은 중앙군도 있었다. 뒤에는 일본식 군제의 영향을 받은 훈련대와 대한제국기의 시위대·진위대도 있었다. 조선은 근대식 군대의 필요를 모른 나라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그 군대가 누구의 명령을 따라 무엇을 향해 움직였느냐였다. 조선군은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왕권, 왕비 세력, 대원군, 친일 내각, 청과 일본의 압력 사이에서 찢어졌다. 동학농민전쟁 진압은 그 붕괴가 눈앞에 드러난 결정적 장면이었다. 백성은 이미 싸웠지만, 조선 국가는 그 싸움을 개혁과 국방의 힘으로 바꾸지 못했다.

조선이 공들여 길러낸 신식군이 어떻게 백성 진압에 동원되고, 일본군 지휘선 아래 놓이고, 끝내 궁궐 권력투쟁과 을미사변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지를 보는 글이다.

조선은 군대가 없어서 무너진 것이 아니다. 군대는 있었지만, 그 군대를 나라 지키는 힘으로 묶어낼 국가가 무너지고 있었다.

조선은 이미 신식군을 만들고 있었다

조선이 근대식 군대의 필요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임오군란 이후 신식군대 양성은 조정 안에서도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 별기군의 실패와 구식 군영의 반발을 겪은 뒤에도 조선은 다시 근대식 장교와 병사를 길러내려 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연무공원이었다.

연무공원은 단순한 훈련장이 아니었다. 조선이 자기 손으로 근대식 장교를 길러보려 한 제도적 시도였다. 조선 정부는 미국에 군사교관 파견을 요청했고, 수석 교관 다이, 조교관 커민즈와 리, 닌스테드가 들어왔다. 이들은 조선 청년들에게 서구식 대열, 사격, 지휘, 장교 교육을 가르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연무공원 학도들은 새 제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조선 정부는 미국식 훈련만 기대한 것이 아니라 각국의 신식 무기와 훈련 체계에도 관심을 두었다. 후장식 소총, 신식 탄약, 서구식 대열과 명령체계는 조선 군사개혁의 언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다시 말해 조선은 아무것도 몰라서 망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안정적으로 굴러가지 못했다. 양반 출신 학생들의 군사훈련 기피, 재정난, 교관단 운영 문제, 청과 일본의 개입, 조정 내부의 우유부단함이 계속 발목을 잡았다. 결정적으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군을 무장해제하는 과정에서 연무공원의 무기까지 약탈되었다. 장교를 기르려던 제도는 제대로 뿌리내리기 전에 외세의 군사개입 앞에서 기능을 잃었다.

군대는 총과 제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군대는 지휘권, 병참, 훈련, 명령 체계, 정치적 목표가 하나로 묶일 때 비로소 군대가 된다. 조선은 신식군의 껍데기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그 군대를 누구를 위해, 누구를 향해, 어떤 국가 목표 아래 움직일 것인지를 정하지 못했다. 이 빈틈이 곧 조선군 몰락의 입구가 되었다.

군대는 있었지만 방향이 없었다

조선 말 조선군의 문제는 단순한 무기 부족이 아니었다. 신식군을 만들고, 장교를 기르고, 중앙군을 편성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그 군대를 나라 지키는 힘으로 집중시키는 권력 구조가 없었다. 군대는 있었지만, 군대를 붙들 국가가 약했다.

일본군은 조선군에게 무엇이었나

조선군 장교에게 일본군은 단순한 외국 군대가 아니었다. 일본군은 교관이었고, 전장 지휘관이었고, 곧 자신들의 무장을 빼앗을 수 있는 압도적 제국군이었다. 조선군은 일본군을 미워하면서도 일본군의 지휘체계와 병참과 화력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 모순이 조선군의 정신을 더 깊게 갈라놓았다.

동학농민전쟁 때 일본군은 조선군과 같은 전선에 선 정도가 아니었다. 일본은 조선 정부로부터 조선군의 지휘권을 확보했고, 조선군 일부는 일본군의 지휘 아래 농민군을 진압했다. 조선 왕의 이름으로 내려온 명령이었지만, 전장에서는 일본군 장교의 명령선이 작동했다. 조선군에게 이것은 군인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굴욕이었을 것이다.

곧이어 벌어진 청일전쟁은 그 굴욕을 더 키웠다. 일본은 개전 당시 육군 7개 사단, 동원병력 12만 명, 출동병력 17만 명 수준의 근대 군대를 움직였다. 일본 해군도 군함 28척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군 장교가 보는 일본군은 더 이상 왜관 주변에서 보던 외국 병력이 아니었다. 조선 땅에서 청군을 몰아내고,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치를 흔드는 실전 군대였다.

러일전쟁에 이르면 체감은 더 커진다.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 전장으로 1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보냈다. 대한제국군이 보는 일본군은 더 이상 조선 안에 들어온 외국군 정도가 아니었다. 한반도를 자기 전쟁의 병참선으로 쓰고, 철도와 통신과 항만을 전쟁 수행의 도구로 바꾸는 제국군이었다.

조선군이 체감한 일본군의 크기

동학농민전쟁에서는 조선군을 지휘한 외국군이었다.

청일전쟁에서는 조선 땅에서 청군을 몰아낸 근대 군대였다.

개전 당시 일본군은 육군 7개 사단, 동원 12만 명, 출동 17만 명 규모였다.

러일전쟁에서는 1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대륙 전장으로 보낸 제국군이었다.

대한제국군에게 일본군은 적이면서 스승이었고, 지휘관이면서 무장해제의 집행자였다.

동학농민전쟁은 백성이 안 싸운 증거가 아니다

동학농민전쟁은 백성이 안 싸웠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백성이 이미 싸웠다는 증거다. 고부에서 시작된 분노는 탐관오리의 수탈, 지방행정의 붕괴, 민씨 척족 권력에 대한 반감, 외세 침투에 대한 위기의식과 결합했다. 농민군의 요구에는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조선 사회를 고쳐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문제는 조정의 대응이었다. 조선 조정은 농민군의 요구를 국가개혁의 신호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조정의 눈에 농민군은 나라를 고치라는 백성이 아니라 토벌해야 할 반란군이었다. 이 지점에서 조선군은 백성을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백성을 진압하는 군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이 농민군의 분노마저 조선 내부 권력투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봉준과 대원군의 관계, 대원군 측 밀사와 밀지 문제, 겉으로는 해산을 권하면서 실제로는 일본을 몰아내기 위한 봉기를 부추겼다는 효유문 문제는 동학농민전쟁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농민의 분노는 분명 실제였고, 개혁 요구도 분명했다. 그러나 그 분노는 곧 궁궐 정치와 외세 대결의 판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것이 조선 말 비극의 첫 번째 구조다. 백성은 싸웠다. 그러나 조정은 그 싸움을 개혁으로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백성의 싸움은 대원군, 민씨 세력, 청, 일본이 얽힌 정치판 안에서 토벌과 이용의 대상이 되었다. 백성의 분노를 나라를 고치는 힘으로 만들지 못한 순간, 조선군은 백성을 향해 움직이는 칼이 되었다.

양호도순무영은 교도중대 하나가 아니었다

동학농민군이 다시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일본군과 협력해 농민군을 무력 진압하기로 했다. 통위영과 장위영 소속 부대가 주력이 된 양호도순무영이 설치됐고, 신정희가 도순무사로 임명됐다. 이름만 보면 조선 정부가 조선군을 동원한 진압 작전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구조는 훨씬 크고 복잡했다. 양호도순무영은 교도중대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 지휘부에는 호위청, 통위영, 장위영, 총어영, 용호영, 경리청 등 중앙군 병영 인원이 배속됐다. 공개된 기록 기준으로 양호도순무영 지휘부 배속 인원은 526명이고, 그 지휘 아래 실제 진압작전에 투입된 장졸은 2,501명으로 정리된다.

출진 병력의 구성을 보면 더 선명하다. 좌선봉인 통위영 영관 이규태가 지휘한 병력은 402명으로 정리된다. 우선봉인 장위영 영관 이두황은 381명을 이끌었다. 장위영 영관 원세록의 병력 351명도 따로 움직였다. 경리청 영관 홍운섭의 병력은 358명, 경리청 영관 겸 서산군수 성하영의 병력은 370명으로 기록된다. 교도대 영관 이진호가 지휘한 교도중대는 255명이었다. 장위영 교장 원봉석이 지휘한 천안방수군 36명, 강화도 진무영 중군 황헌주가 지휘해 전주성을 지킨 327명도 이 체계 안에서 설명된다.

그러니 조선군의 동학농민군 진압은 특정 부대 하나의 일탈이 아니었다. 통위영, 장위영, 경리청, 교도중대, 진무영 계열 병력이 함께 움직였다. 여기에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가 결합했다. 이 복합 진압 체계가 바로 조선군 몰락의 핵심이다. 조선 중앙군 전체가 조선 백성을 향한 진압선에 세워졌고, 그 위에 일본군의 지휘권이 얹혔다.

왕명은 조선의 이름이었지만 지휘권은 일본군 쪽에 있었다

일본은 서울에 주둔하던 제18대대 일부를 전라도로 보냈고, 제19대대를 중심으로 농민군 섬멸을 목적으로 한 부대를 농민군 봉기 지역으로 파견했다. 동시에 조선 정부로부터 조선군의 지휘권을 확보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구조가 나온다. 일본군은 단순한 지원군이 아니었다.

일본군의 명령에는 조선군 각 부대의 진퇴와 조달이 일본군 사관의 명령에 따르게 되어 있었다. 일본 군법을 따르게 하며, 군법을 위반하면 군율로 처리한다는 취지도 조선 정부를 통해 하달됐다. 왕명은 조선 왕의 이름으로 내려갔지만, 전장의 실제 지휘선은 일본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농민군은 조선 관군만 상대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과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관군을 동시에 상대했다. 이것이 조선군 몰락의 가장 잔인한 대목이다. 공들여 길러낸 조선의 신식군과 중앙군이 외적을 막는 전선이 아니라, 외국군 지휘 아래 조선 백성을 치는 전선에 선 것이다.

왕의 이름으로 내려간 명령이었지만, 전선의 지휘권은 일본군 쪽에 있었다. 조선군은 조선 백성을 치는 자리에서 외국군의 지휘를 받았다.

우금치에 선 관군은 낡은 포졸이 아니었다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몰락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우금치에 선 관군은 이름 없는 지방 포졸이 아니었다. 경리청군, 장위영군, 통위영군, 일본식으로 훈련된 교도중대가 투입됐다. 조선 정부가 동원할 수 있었던 최정예에 가까운 중앙군이었다.

농민군 규모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우리역사넷은 전라도·충청도·경상도 각지의 포접이 연합한 농민군을 1만여 명으로 설명한다. 다른 서술에서는 공주 전투 전체의 농민군을 그보다 크게 잡기도 한다. 수치가 갈리는 이유는 전투 시점, 집결지, 후속 합류 병력, 남접과 북접의 결합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쪽이든 농민군은 수적으로 컸고, 조선 중앙군과 일본군은 화력과 훈련에서 우세했다.

우금치 방어선에는 이규태와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배치됐다. 우금치의 최고봉인 견준봉에는 일본군이 주둔했다. 그 밖에 이진호가 이끄는 교도중대와 성하영이 이끄는 경리청 군사들이 방어선 일대에 배치됐다. 통위영과 장위영, 경리청, 교도중대, 일본군이 한 전선 위에 있었다.

농민군은 좁은 골짜기를 향해 밀고 올라갔다. 그러나 지형은 진압군에게 유리했고, 화력은 불균형했다. 일본군과 조선 중앙군은 고지를 끼고 방어선을 만들었다. 농민군의 용기와 숫자는 조선 중앙군과 일본군이 결합한 방어선, 그리고 우세한 무기와 전술을 뚫지 못했다. 우금치의 패배는 동학농민전쟁의 군사적 동력을 크게 꺾었다.

여기서 핵심은 승패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향해 총을 들었느냐다. 조선의 중앙군은 조선 백성을 막아섰고, 일본군은 그 전선의 지휘권을 쥐었다. 조선이 만들려 했던 신식군의 일부는 나라 밖 침략자를 막는 데 쓰이지 않고, 나라 안 백성의 북상을 막는 데 쓰였다.

우금치의 진짜 의미

우금치는 단순히 농민군이 패배한 전투가 아니다. 조선의 중앙군, 일본식 훈련부대, 일본군이 함께 조선 백성을 막아선 전투다. 조선군의 무기와 훈련이 국가방어가 아니라 내부 진압과 외세 지휘 아래 놓였다는 점에서 이 전투는 조선군 몰락의 상징이다.

훈련대는 몇 명이었고, 무엇을 의미했나

동학농민전쟁 이후 일본의 영향력은 더 깊어졌다. 일본은 갑오개혁 과정에서 조선 군제를 자기식으로 바꾸려 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훈련대였다. 훈련대는 1895년 1월 일본의 주도로 조직된 신식 군대였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건의와 일본군 포병 중좌 구스노세 유키히코의 훈련이 그 배경에 있었다.

처음에는 중앙에 2개 대대가 편성됐다. 이후 평양에 제3대대, 청주에 제4대대가 설치됐다. 1895년 7월에는 중앙의 제1대대와 제2대대를 훈련 제1연대로 편제했다. 대대와 중대급 편제까지 확정된 1895년 8월 기준으로 이 연대는 1개 연대, 2개 대대, 4개 중대, 총 1,773명 규모였다.

숫자만 보면 거대한 군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의미는 컸다. 훈련대는 궁궐과 중앙정치 가까이에 배치된 일본식 신식군이었다. 조선이 미국인 교관을 통해 자기식 신식 장교를 길러보려 한 연무공원의 흐름과 달리, 훈련대는 일본 주도의 군제개혁 안에서 만들어진 군대였다.

이 훈련대가 을미사변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명성황후 세력은 훈련대를 위험한 친일 군사조직으로 보았고, 훈련대 장교들은 왕비 세력이 자신들을 해산시키려 한다고 받아들였다. 그 판단이 옳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긴장 속에서 훈련대 장교들의 충성심은 나라 전체가 아니라 자기 부대의 생존, 자기 정치 노선, 일본식 개혁 질서와 뒤엉키기 시작했다.

군인의 충성심은 방향을 잃었다

이런 경험을 한 조선군 장교들의 정신이 멀쩡하기는 어려웠다. 이 말은 그들의 잘못을 덮자는 뜻이 아니다. 군인이 어떤 명령을 받았고, 무엇을 나라를 위한 충성으로 배웠으며, 어떤 권력 구조 속에서 움직였는지를 냉정하게 보자는 뜻이다.

군인은 명령을 따른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는 국가가 백성을 토벌 대상으로 만들고, 외국군에게 지휘권을 내주고, 군대를 궁궐 권력투쟁의 도구로 사용하면 충성심은 비틀린다. 충성은 나라를 지키는 힘이 아니라 특정 권력의 칼이 된다. 조선군 장교들은 왕에게 충성해야 하는지, 왕비 세력에 맞서야 하는지, 대원군의 복귀가 나라를 위한 길인지, 일본식 군제와 개혁 정부가 살 길인지 뒤섞인 시대를 통과했다.

그 와중에도 충성을 다한 군인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충성은 한 방향으로 모이지 못했다. 어떤 충성은 백성 진압에 쓰였고, 어떤 충성은 궁궐 정치에 끌려갔고, 어떤 충성은 일본군의 작전선 안에서 소모됐다. 조선군의 비극은 충성스러운 군인이 없었다는 데 있지 않다. 충성할 국가의 방향이 찢어져 있었다는 데 있다.

이두황의 행적은 조선군 붕괴의 경로를 보여준다

이두황의 행적은 이 구조를 한 인물 안에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섰고, 장위영 영관과 부영관을 거쳤으며, 양호도순무영 우선봉으로 농민군 진압에 투입됐다. 이후 훈련대 제1대대장이 되었고, 을미사변에 가담했다.

이 경로는 단순히 한 장교의 타락만을 뜻하지 않는다. 조선군 장교가 어떻게 농민군 진압, 일본군과 얽힌 전장, 훈련대, 궁궐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그의 책임은 무겁다. 동학농민군 토벌과 을미사변 가담은 지울 수 없는 행적이다. 그러나 그 책임만으로 역사를 닫으면 조선군 몰락의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

이두황은 조선군이 어떤 방향으로 밀려났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조선의 신식 장교는 나라를 지키는 장교로 자라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백성 진압과 권력투쟁, 일본군의 영향 아래 놓였다. 그 안에서 장교의 충성심은 국가방어가 아니라 특정 세력의 생존과 명령 수행으로 좁아졌다.

우범선과 훈련대, 왕후 시해의 어두운 구조

우범선 역시 개인의 배신만으로 닫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별기군과 개화정책의 흐름 위에 있었고, 장위영 영관을 거쳐 훈련대 제2대대장이 됐다. 을미사변 때는 휘하 장병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들어가 명성황후 시해를 방조한 인물로 기록된다.

이 행적은 결코 옹호될 수 없다. 왕후 시해에 가담하거나 방조한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구조 속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는지는 따로 봐야 한다. 훈련대 장교들에게 명성황후 세력은 단순한 왕실의 중심이 아니라 자신들을 해산시키거나 제거할 정치 세력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판단이 옳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식의 명분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조선군 장교들은 이미 동학농민전쟁에서 백성을 향해 총을 들었다. 일본군 지휘선 아래에서 조선 백성을 진압하는 경험도 했다. 그 뒤 궁궐 안에서는 왕권, 왕비 세력, 대원군, 일본공사관, 친일 내각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군대를 흔들었다. 이런 조건에서 훈련대 일부가 왕후 시해에 동원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군이 국가군으로서 얼마나 깊이 무너졌는지를 보여준다.

정당화가 아니라 구조 분석이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장교들의 책임은 책임대로 남는다. 다만 그들을 악인 몇 명으로만 닫아버리면, 조선이 신식군을 백성 진압과 외세 지휘와 궁궐 권력투쟁 속에 밀어 넣은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의 목적은 면죄가 아니라 구조를 보는 것이다.

을미사변은 일본의 침략이자 조선군 몰락의 결과였다

을미사변의 책임은 일본에 있다.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 아래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 조선정부의 일본인 고문, 한성신보사 사장과 기자, 영사경찰, 낭인 세력이 움직였다. 일본 측은 사후 책임전가를 위해 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를 이용하려 했다.

사건 당일 일본인 세력은 대원군과 이재면을 끌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일본인 교관은 야간훈련을 구실로 조선군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했다. 경복궁 담을 넘은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엄호를 받으며 광화문을 열었고, 일본군과 일본인들이 호위한 대원군의 가마와 훈련대가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궁궐 안에서는 시위대가 저항했다. 미국인 교관 다이와 현흥택이 지휘한 시위대 수백 명이 급히 모였지만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했고, 왕후의 거처에서 참혹한 만행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조선 왕실 내부 갈등으로 축소할 수 없는 일본의 침략 행위였다.

그러나 조선군 몰락의 관점에서는 한 가지를 더 봐야 한다. 일본은 조선 내부의 군대 균열을 이용했다. 대원군을 끌어들이고, 조선군 훈련대를 이용하고, 일본인 교관과 일본군 수비대를 움직였다. 조선군 일부가 이 구조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바로 비극이다.

왕후를 지켜야 할 나라의 군대가, 일본의 침략 작전과 조선 내부 권력투쟁이 결합한 자리에서 흔들렸다. 동학농민전쟁 때 백성을 향했던 총구는 이제 궁궐 안 권력투쟁의 폭력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생긴 패륜이 아니다. 조선군이 이미 국가방어 조직으로서 중심을 잃어가던 과정의 결과였다.

왕과 왕비와 대원군에게 휘둘린 군대

조선 말의 권력 구조는 군대를 한 방향으로 묶어낼 수 없었다. 고종은 왕권을 지키려 했고, 명성황후 세력은 민씨 척족 권력과 대외 노선을 붙들려 했다. 흥선대원군은 다시 권력을 회복하려 했고, 친일 개화세력은 일본식 질서 속에서 조선을 바꾸려 했다. 청과 일본, 러시아의 이해관계까지 겹치며 조선의 군대는 계속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겨졌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대원군은 임오군란 뒤 청에 끌려갔고, 동학농민전쟁 뒤에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장악했다. 왕비는 일본 세력에 의해 궁궐 안에서 시해됐고, 조선은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버티다가 끝내 국권을 잃었다. 이 흐름은 우연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다. 왕권, 외척, 대원군, 외세가 군대와 백성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간 결과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은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흔들리는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신식군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신식군은 있었다. 그러나 그 신식군은 동학농민군 진압에 쓰이고, 일본군 지휘 아래 놓이고, 훈련대와 궁궐 권력투쟁 속에 소모됐다. 조선군은 전투에서 한 번 패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지휘권과 충성의 방향을 잃으며 무너졌다.

러일전쟁은 일본군의 압도감을 확정했다

러일전쟁은 대한제국군에게 일본군의 존재를 완전히 다르게 보이게 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중립을 사실상 무시하고 한반도를 전쟁 수행의 통로로 삼았다. 서울에 병력을 들이고, 철도와 통신과 병참선을 장악하고, 한일의정서를 강요했다. 대한제국군이 보는 일본군은 더 이상 일시적으로 들어온 외국군이 아니었다. 한반도를 자기 군사작전의 뒤뜰처럼 쓰는 제국군이었다.

전쟁 규모도 달랐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1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대륙 전장으로 보냈다. 조선과 대한제국이 보유한 병력 규모와는 차원이 달랐다. 조선군 장교들이 동학농민전쟁에서 일본군 지휘를 받았고,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몰아내는 장면을 보았다면, 러일전쟁은 일본군이 제국 단위의 전쟁을 수행하는 모습을 눈앞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숫자의 차이가 아니다. 일본군은 동원, 수송, 보급, 철도, 병참, 해군, 야전군 편제를 결합해 전쟁을 굴렸다. 대한제국군은 궁궐과 지방 요지에 흩어진 병력, 흔들리는 재정, 일본 고문정치의 압박 속에 놓였다. 일본군을 보는 대한제국군 장교의 감정은 단순한 분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굴욕, 열등감, 공포, 모방 욕망, 생존 계산이 동시에 섞였을 것이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조선군의 몰락은 일본군에게 한 번 패배해서 생긴 일이 아니다. 일본군을 근대 군대의 기준처럼 보게 된 순간, 조선군의 정신은 더 깊게 갈라졌다. 나라를 흔드는 외국군이 동시에 군사적 표준으로 보이는 상황은 군인에게 가장 위험한 균열을 만든다.

조선군에게 일본군은 적이면서 스승이었고, 지휘관이면서 처형자였으며, 끝내 자신들의 무장을 빼앗을 제국의 군대였다.

군대해산 때 대한제국군은 어떻게 무너졌나

대한제국 군대해산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그 전부터 대한제국의 군사력은 계속 일본의 압력 아래 놓여 있었다.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고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을 합법화했다. 한국 주차군사령부가 설치됐고, 일본인 군부고문은 대한제국 군제와 예산을 흔들었다.

군대해산 직전에는 고종 강제퇴위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일부 무장군인들이 군중과 함께 움직일 가능성이 보였다. 일본은 이 결합을 두려워했다. 군대가 백성과 다시 결합하면 항쟁의 중심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위대 탄약을 회수하고, 용산의 군기창을 장악하고, 해산식을 준비했다. 무기와 탄약을 먼저 빼앗은 뒤 군인의 몸에서 군대라는 형식을 떼어내려 한 것이다.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은 대한제국군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병사들은 훈련 명목으로 모였고, 해산 조칙이 낭독됐다. 계급장은 떼어졌고, 무기는 반납됐다. 주위에는 일본군이 배치됐다. 군대해산은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공식 군사력을 제거하는 무장해제였다.

이날 훈련원 해산식에 참가한 병력은 제1연대 제2대대 575명, 제1연대 제3대대 488명, 제2연대 제3대대 405명, 기병대 88명, 포병대 106명, 공병대 150명으로 모두 1,812명이었다. 그러나 해산식에 참가하지 않은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은 무장한 채 병영을 이탈해 서울 시내 곳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박승환 참령의 자결과 서울 시위대의 저항은 이 해산이 얼마나 치욕적인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서울에서 시위대 일부는 일본군과 교전했다. 지방 진위대도 순순히 흩어지지 않았다. 8월 3일 개성·청주를 시작으로 지방 진위대 해산이 진행됐고, 8월 6일 원주진위대의 저항, 강화도 분견대의 무장봉기, 충주·제천 등지의 저항이 이어졌다. 9월 3일 북청진위대를 마지막으로 지방 진위대도 해산됐다.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은 외적과 맞붙어 국가전쟁을 치르다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먼저 백성 진압에 쓰였고, 일본군 지휘 아래 놓였고, 궁궐 권력투쟁에 휘말렸고, 러일전쟁 뒤 일본의 군사·재정 압박 속에서 축소됐으며, 마지막에는 무장해제됐다. 이것이 조선군 몰락의 차가운 경로다.

그러나 흩어진 군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서 결론은 조선군을 비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선군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조선군은 백성 진압에 동원됐고, 일본군 지휘 아래 놓였고, 일부 장교는 을미사변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 책임과 비극은 함께 보아야 한다.

그러나 군대해산 뒤 흩어진 군인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시위대와 진위대 출신 군인들은 각지의 항일무장투쟁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들은 사격 경험, 부대 운용 감각, 지휘 경험, 근대식 무기 사용 능력을 갖고 있었다. 국가가 품지 못한 군사력이 국가 밖의 저항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 지점이 조선군 몰락의 이중성이다. 공들여 길러낸 신식군은 먼저 백성 진압과 외세 지휘 아래 소모됐다. 그러나 끝내 무장해제된 뒤에는 그 군사 경험이 항일무장투쟁의 뼈대가 됐다. 조선군은 실패한 국가의 군대였지만, 그 안의 병사와 하급 지휘 경험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붕괴된 군대의 파편이 다시 저항의 근간으로 이동했다.

마지막 정리: 조선군의 몰락은 차가운 구조다

조선 말의 비극은 백성이 안 싸웠다거나 군대가 없었다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백성은 동학농민전쟁으로 이미 싸웠다. 조선은 신식군을 만들려 했다. 미국인 교관을 불렀고, 장교를 기르려 했고, 중앙군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 힘을 나라 지키는 방향으로 묶어내지 못했다.

동학농민전쟁 진압은 조선군 몰락의 출발점이었다. 백성의 분노는 토벌 대상이 되었고, 조선군은 일본군 지휘 아래 그 백성을 향해 섰다. 우금치에서 조선 중앙군과 일본군은 같은 진압선에 있었다. 통위영, 장위영, 경리청, 교도중대, 진무영 계열 병력이 양호도순무영 체계 안에서 움직였고,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가 그 위에 놓였다.

조선군에게 일본군은 단순한 적이 아니었다. 동학농민전쟁에서는 자신들을 지휘했고, 청일전쟁에서는 10만 단위 병력으로 청군을 몰아냈고, 러일전쟁에서는 1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대륙 전장으로 보냈다. 일본군은 미워해야 할 침략자였지만, 동시에 조선군이 부정할 수 없는 근대 군대의 실물이었다.

이두황과 우범선 같은 인물의 행적은 개인 비난만으로 닫을 수 없다. 책임은 책임대로 남는다. 그러나 그들이 걸어간 길은 조선군이 백성 진압, 외세 지휘, 궁궐 권력투쟁 속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여준다.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의 침략 행위였고, 동시에 이미 흔들리던 조선군이 얼마나 깊이 권력투쟁에 빨려 들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끝내 대한제국군은 무장해제됐다. 그러나 그 뒤 흩어진 군인들은 항일무장투쟁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것은 찬양도 아니고 비난도 아니다. 조선 말 국가 붕괴가 군대의 방향을 어떻게 비틀었고, 그 비틀린 군사력이 다시 저항의 뼈대로 이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차가운 구조다.

조선은 군대가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다. 공들여 길러낸 신식군을 나라 지키는 힘으로 쓰지 못했고, 일본군 지휘 아래 백성을 향해 세웠으며, 무장해제 뒤 흩어진 군인들은 다시 항일무장투쟁의 근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