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잃은 사극, 누구를 위한 정밀함인가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선택적 고증’의 폐해를 비판적으로 진단합니다. 왜 유독 중국 관련 묘사에만 집착에 가까운 정밀함이 동원되는지, 이러한 비대칭이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고 시청자의 역사 인식을 해치는지 그 구조적 원인과 창작 윤리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최종 업데이트: 2025-10-15)
왜곡된 거울: 사극의 ‘선택적 고증’은 어떻게 역사를 해치는가
들어가며: 변명이 된 ‘정밀함’을 비판한다
최근 사극에서 반복되는 기이한 현상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사 고증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유독 중국 관련 의례만큼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정밀하게 구현됩니다. 이러한 노골적인 비대칭을 두고 제작진은 ‘리스크 관리’와 ‘풍부한 자료’를 변명처럼 내세웁니다. 하지만 이는 창작적 나태와 상업적 굴복이 빚어낸 기만적인 타협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글은 그 인상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 이러한 제작 행태가 왜 문제이며 어떻게 우리의 역사 인식을 훼손하는지를 정면으로 비판하고자 합니다.
(예상 소요 시간: 12분. 문제의 현상, 구조적 변명, 그리고 그것이 낳는 폐해를 차례로 짚고, 창작자에게 필요한 윤리적 원칙을 요구하며 마무리됩니다.)
첫 번째 : 드문 의례를 일상으로 만드는 ‘사실의 왜곡’
조선이 명·청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료가 풍부하다는 이유만으로, 왕의 책봉이나 조공 사신을 맞는 극히 드물고 예외적인 의식을 마치 일상적인 풍경처럼 전시하는 것은 명백한 왜곡입니다. 이는 사실에 기반한 재현이 아니라, 카메라가 사랑하는 장중한 스펙터클을 반복적으로 내보내 시청자에게 굴종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행위입니다. 역사적 빈도를 무시한 채 특정 장면만 과잉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시청자를 오도하는 기만적인 편집입니다.
두 번째 : 비겁함이 낳은 ‘선택적 고증’이라는 기형
2021년 ‘조선구마사’ 사태 이후, 업계에는 중국발 논란에 대한 극도의 공포가 새겨졌습니다. 그 결과, 가장 비판받기 쉬운 지점, 즉 눈에 바로 보이는 의례와 복식에만 자원을 쏟아붓는 기형적인 제작 관행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품질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비난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막이자 ‘준수 퍼포먼스(Compliance Performance)’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고증은 보이지 않는 생활사와 당대인의 사고방식까지 파고드는 집요함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지금의 ‘선택적 고증’은 가장 손쉬운 길을 택한 창작적 게으름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가장 크게 터질 곳만 막으면 된다는 안일함이 결국 작품 전체의 균형과 완성도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세 번째 : 위계를 감정으로 체화시키는 ‘종속의 리듬’
이 문제는 단순한 장면의 빈도를 넘어섭니다. 제작진은 카메라의 높이, 숏의 길이, 인물의 시선 처리를 통해 의도적으로 위계를 감정적으로 체화시킵니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낮은 앵글, 길고 장엄한 호흡으로 담아내는 의식 장면은 ‘사실 재현’의 영역을 넘어 ‘감정적 동화’를 강요합니다.
이러한 연출적 장치들이 반복될 때, 시청자는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대신 화면이 주입하는 굴종의 감각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하게 됩니다. 결국 편집의 리듬과 연출의 문법이, 희귀한 의례를 우리 역사의 보편적인 정서인 것처럼 오인하게 만드는 가장 교묘하고 위험한 장치가 됩니다.
고증은 변명일수 없다: 창작자의 윤리를 묻는다
“중국과의 교류가 잦았으니 어쩔 수 없다”는 항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등장의 빈도가 아니라 고증의 ‘비대칭성’입니다. 중국 관련 의례에 들이는 노력의 절반이라도 우리 내부의 위계질서나 다른 국가와의 외교, 평범한 백성의 삶을 재현하는 데 사용했다면 지금과 같은 논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의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며,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입니다. 시청자의 비판을 회피하기 위해 특정 부분만 파고드는 것은 책임 있는 창작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제는 감정적인 분노를 넘어, 다음과 같은 명확한 기준과 원칙을 사회적으로 요구해야 합니다.
- 고증의 균형: 모든 장면에 동일한 수준의 고증 잣대를 들이대고, 그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라.
- 연출의 중립: 특정 관계를 미화하거나 비하하는 감정적 연출을 지양하고, 객관적 거리감을 유지하라.
- 서사의 대칭: 특정 국가와의 관계에만 서사적 비중과 연출적 에너지를 쏟아붓는 비대칭을 거부하라.
결론: 거울을 바로 세울 의무
지금 사극이 보여주는 비대칭적 정밀함은 합리적 선택의 결과가 아닌, 두려움이 낳은 자기기만입니다. 창작자는 시청자에게 역사를 보여주는 거울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거울이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특정 모습만을 과장되게 비춘다면, 그것은 더 이상 거울이 아니라 역사를 가두는 왜곡의 틀일 뿐입니다.
의도는 숨길 수 있어도 화면에 드러난 패턴은 명백한 증거로 남습니다. 그리고 그 패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시청자의 권리이자, 건강한 창작 생태계를 위한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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