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 식민지 잔재가 폭발한 74일의 영토전
포클랜드 전쟁은 19세기 제국 점유로 생긴 주권 분쟁이 1982년 74일 원정 정규전으로 폭발한 사건이다. 협상 교착과 방위 축소 신호, 군사정권의 국내 위기가 겹치며 ‘식민지 잔재의 영토전’이 현실이 됐다.
<pta-ke-size="size16">최종 업데이트 2025-11-22
주권 분쟁의 긴 배경, 1833년부터 1982년 직전까지
포클랜드 문제의 출발점은 1833년 영국의 재점유다. 영국은 이후 오랜 행정과 주민 공동체 형성을 근거로 “연속적 실효 지배”를 주권의 핵심으로 삼아 왔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스페인 식민지 시기의 권리를 독립국이 승계했다는 논리로 섬을 ‘역사적 영토’로 본다. 두 논리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구조적으로 봉합되기 어렵다. 이 충돌은 20세기 내내 외교 의제가 됐고, 1982년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누적됐다.
탈식민 질서 속에서 유엔은 1965년 12월 16일 총회 결의 2065호로 분쟁의 존재를 공식 인정하고 평화협상을 권고했다. 그러나 결의가 ‘탈식민 원칙’과 ‘섬 주민의 이익’이라는 두 축을 함께 담으면서, 협상은 시작됐지만 종착역은 더 멀어졌다. 1966년 이후 양국은 여러 차례 협상을 벌였으나 주권 귀속 문제에서 매번 교착됐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 무렵까지는 ‘리스백’ 구상이 절충안으로 부상했다. 명목상 주권을 아르헨티나로 넘기되 일정 기간 영국이 관리권을 임차해 주민 생활을 유지한다는 방식이었지만, 섬 주민의 강경한 반대와 영국 의회의 정치적 부담이 겹치며 폐기됐다.
협상 실패가 쌓이던 와중에 1981년 영국의 국방검토가 남대서양의 상징적 초계함 HMS 엔듀어런스를 철수시키는 방향을 포함하며 “영국의 방어 의지가 약해졌다”는 신호를 대외적으로 흘렸다. 영국 내부에서도 전후 평가에서 이 신호가 아르헨티나의 오판을 키웠다는 비판이 나왔다. 동시에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경제 붕괴와 반정부 시위로 정당성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다. 갈티에리 정권은 말비나스 회복을 ‘국내 결집과 위기 돌파’ 수단으로 삼을 유혹에 빠졌고, “짧은 점령이 영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낼 것”이라 낙관했다. 여기에 1982년 3월 19일 사우스조지아 리스 하버에서 아르헨티나 고철업자들이 국기를 게양한 사건이 직전 도화선 역할을 하며, 2주 뒤 본섬 침공으로 이어졌다.
1833년의 주권 유산과 1965년 이후 협상 교착, 1981년 방위 축소 신호, 1982년 군사정권 위기가 전쟁을 밀어올렸다.
개전과 원정의 구조, 1982-04-02부터 1982-04-05까지
1982년 4월 2일 새벽 아르헨티나 해병여단은 작전 로사리오로 포트스탠리를 기습 점령했다. 영국 수비대는 해병 68명과 항해측량 인원 11명, 소수의 지역 의용대가 전부였고 약 3시간 교전 뒤 항복했다. 아르헨티나는 곧바로 마리오 메넨데스를 군사총독으로 임명해 통치를 선언했고, 4월 3일 사우스조지아 섬까지 점령했다. 영국은 외교적 철수 요구가 실패하자 4월 5일 항공모함 허미스와 인빈서블을 축으로 한 원정 태스크포스를 출항시켰다. 런던에서 전장까지 약 12,000킬로미터, 해상거리 8,000해리의 보급전이 시작됐고, 아센션 섬 와이드어웨이크 기지가 원정 유지의 생명선이 됐다.
아르헨티나의 선제 점령과 영국의 초장거리 원정 출항이 전쟁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
상륙 전 판짜기, 블랙 벅과 잠수함의 전환점
영국은 상륙 전에 섬의 항공 운용을 묶기 위해 장거리 공습을 감행했다. 1982년 5월 1일 RAF 벌컨 폭격기는 작전 블랙 벅 1차로 포트스탠리 활주로에 1,000파운드 폭탄 21발을 투하했다. 벌컨 1대가 목표에 도달하려면 급유기들이 연쇄적으로 급유를 이어가야 했고, 총 14차례 공중급유가 필요했다. 왕복 약 6,760해리의 비행은 당시 최장거리 폭격으로 기록됐으며, 활주로를 완전히 끊지는 못했지만 미라주 III 같은 고성능 전투기의 상시 전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같은 날부터 시해리어와 함포가 방공망과 기지를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바다에서는 5월 2일이 전면적 전환점이었다. 영국 핵잠수함 HMS 컨커러가 아르헨티나 순양함 ARA 헤네랄 벨그라노를 어뢰로 격침해 323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 아르헨티나 해군 수상전력은 사실상 항구로 후퇴했고, 남은 전쟁은 공군의 저고도 타격과 지상 방어 중심으로 재편됐다. 영국이 상륙을 감행할 수 있었던 전제는 잠수함이 확보한 제해권이었다. 전쟁의 주도권은 이 시점부터 영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블랙 벅은 섬의 제공권 운영을 묶었고, 벨그라노 격침은 아르헨티나 해군을 전장 밖으로 밀어냈다.
엑조세가 만든 해상 손실과 작전 변경
아르헨티나는 슈퍼 에탕다르와 AM39 엑조세 대함미사일로 영국 함대를 노렸다. 1982년 5월 4일 엑조세 1발이 구축함 HMS 셰필드를 피격해 20명이 사망했고, 셰필드는 5월 10일 예인 중 침몰했다. 이 타격은 영국에 항모 외곽 방공의 취약함을 각인시켰다. 더 결정적인 피해는 5월 25일 수송선 SS 애틀랜틱 컨베이어의 격침이었다. 이 배에 실려 있던 치누크 대형수송헬기 4대 중 3대와 활주로 건설, 보급 장비가 소실되며 영국 지상군의 기동 계획이 붕괴했다.
애틀랜틱 컨베이어 상실 이후 영국군은 헬기 기동을 전제로 한 속도전 대신, 도보 행군과 제한적 차량 운용으로 전환해야 했다. 전쟁 후반부 보병 야간 고지전이 불가피해진 배경에는 이 ‘보급 타격’이 깔려 있었다. 엑조세는 수량이 많지 않았음에도 전장의 형태를 바꾸는 전략무기였다는 평가를 남겼다. 영국은 항모 방어선을 더 바깥으로 벌리고, 상륙 해역의 대공망을 촘촘히 재조정하며 대응했다. 해상전은 이때부터 ‘서로가 가장 아픈 지점을 건드리는 소모전’으로 급격히 거칠어졌다.
엑조세는 영국 함대를 찢었고, 영국 지상전의 기동 방식까지 강제로 바꿨다.
산카를로스 상륙과 ‘봄 앨리’의 5일
영국은 1982년 5월 21일 동포클랜드 서해안 산카를로스 워터에 상륙해 교두보를 세웠다. 상륙 해역은 좁은 수로라 함정이 밀집했고, 아르헨티나 공군은 본토에서 출격한 스카이호크와 대거, 캔버라로 저고도 급강하 폭격을 퍼부었다. 5월 21일부터 25일까지 이 구간은 ‘봄 앨리’라 불릴 정도로 공습이 집중됐다. 영국은 HMS 아던트, HMS 앤틸로프, HMS 코번트리를 잃었고 다수 함정이 중파됐다.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은 레이더를 피하려 수면 가까이 폭탄을 투하했는데, 너무 낮은 고도로 신관이 작동하지 않는 불발탄이 다수 발생해 영국 함정이 폭탄 해체 중 폭발로 침몰하는 2차 피해도 겪었다.
그럼에도 영국은 상륙을 유지하며 내륙 진출을 시작했다. 상륙 성공은 전쟁의 중심을 해상에서 지상으로 옮기는 전환점이었고, 아르헨티나가 더 이상 ‘점령의 기정사실’로 버티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었다. 영국은 여기서부터 포트스탠리로 향하는 보병 돌파로 승부를 걸었다. 아르헨티나는 해군 대신 공군과 참호 방어에 모든 자원을 집중해야 했다. 전쟁은 이제 섬 내부의 고지와 마을을 두고 싸우는 단계로 넘어갔다.
산카를로스는 상륙 성공과 해상 피해가 동시에 터진 전쟁의 최대 고비였다.
구스그린·다윈, 첫 지상 결전
상륙군이 교두보를 확장하며 첫 대규모 지상전이 1982년 5월 27일 밤부터 5월 28일까지 구스그린과 다윈에서 벌어졌다. 영국 2공수대대 약 700명은 아르헨티나 제12보병연대의 참호선과 공항 방어 진지를 야간 근접전으로 돌파했다. 해군 함포와 포병 지원이 결합됐지만, 개활지와 이탄 습지가 전진 속도를 늦추며 육탄전이 길어졌다. 지휘관 H 존스 중령은 기관총 진지를 돌격하다 전사했고, 이후 지휘를 이어받은 크리스 키블 소령이 공세를 마무리했다. 전투 결과 아르헨티나 병력 961명이 포로로 잡히고, 영국은 전사 18명의 피해를 입었다.
구스그린 승리는 단순한 지역 확보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영국은 “섬 내부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고, 교두보가 안전해지면서 포트스탠리로 향하는 주 보급선이 열렸다. 아르헨티나는 남부 방어선이 무너지며 스탠리 주변 고지 방어에 병력을 재배치해야 했다. 이 단계부터 전쟁은 ‘스탠리 외곽 고지전’이라는 뚜렷한 종착역을 향해 수렴한다. 전선은 좁아졌고, 한 번의 야간 고지 공격이 전쟁 전체를 흔들 수 있는 구조가 됐다. 영국은 속도를, 아르헨티나는 시간을 벌어야 하는 게임에 들어갔다.
구스그린 승리는 영국이 내륙 주도권을 확정한 첫 지상 결전이었다.
스탠리로 가는 6월 고지 야간전
애틀랜틱 컨베이어 손실로 헬기 기동이 제한된 영국군은 도보로 스탠리 서쪽 고지대를 넘어야 했다. 최종 공세는 1982년 6월 11일 밤 시작됐다. 같은 밤 영국군은 마운트 해리엇, 투 시스터스, 마운트 롱던을 동시 공격해 스탠리 외곽 방어망을 흔들었다. 마운트 해리엇은 42코만도대가 후방 침투로 방어선을 붕괴시키며 6월 12일 새벽 장악했다. 투 시스터스는 40·45코만도대가 야간 상승 공격으로 능선을 확보해 스탠리 접근로를 열었다.
가장 치열했던 곳이 마운트 롱던이었다. 3공수대대는 참호와 지뢰, 저격·박격포가 얽힌 능선을 6월 11일 밤부터 12일까지 근접전으로 돌파했고, 영국은 전사 23명으로 전쟁 중 최대 지상 손실을 치렀다. 이어 6월 13일 밤부터 14일 새벽까지 스코츠가드 2대대가 마운트 텀블다운의 아르헨티나 해병 5대대 방어선을 야간 3단계 돌파로 공략했다. 암반 능선에서 총검과 수류탄이 오가는 근접전 끝에 고지가 넘어가자, 같은 밤 2공수대대가 와이어리스 리지를 점령해 스탠리를 포병 사정권에 완전히 넣었다. 1982년 6월 14일 오전 메넨데스 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며 전쟁은 끝났다.
6월의 연쇄 고지 야간전이 스탠리 포위를 완성해 항복을 직접 끌어냈다.
거리와 기술, 환경이 만든 1980년대식 식민지전
포클랜드는 원정 거리 자체가 전쟁의 절반이었다. 영국은 항모 2척과 구축함, 프리깃, 상륙전단을 8,000해리 넘게 운용하며 초장거리 보급을 유지해야 했다. 제공권은 시해리어와 최신형 AIM-9L 사이드와인더의 근접 교전 우위가 지탱했지만, 아르헨티나 공군은 본토 출격으로 목표 상공 체공 시간이 10분 남짓에 불과한 연료 제약 속에서도 저고도 돌입으로 끝까지 함대를 위협했다. 남대서양의 강풍과 저시정, 이탄 습지와 바위 능선으로 이어지는 지형은 보병 야간 고지전을 강제했다. 이 전쟁이 구식 영토전처럼 보이면서도 현대적 기술전으로 평가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결국 포클랜드는 식민지 주권 유산의 전쟁이자, 1980년대 원정·기술·환경이 결합한 특수한 현대전이었다. 이런 복합성이 전쟁의 상징성을 더 키웠다.
포클랜드는 제국의 영토전 문법 위에 1980년대 원정·기술전이 덧씌워진 전쟁이었다.
전후 효과와 ‘식민지 잔재의 마지막 전쟁’이라는 의미
전쟁은 74일 만에 끝났지만 정치적 파장은 길었다. 영국은 해외 영토 방어 의지를 재확인했고, 대처 정부는 국내 정치에서 강한 반등을 얻었다. 아르헨티나는 패전 충격으로 군사정권이 붕괴하며 1983년 민주화 전환으로 이어졌다. 섬 주민의 자기결정권은 전후 논쟁의 중심축이 되었고, 스탠리 주변의 방어 구조도 영국의 대규모 재투자로 강화됐다. 현실적 이해관계도 커져 1986년 이후 어업권과 배타적경제수역의 경제적 가치가 섬의 생존 기반이 됐다.
포클랜드 전쟁이 ‘식민지 잔재의 영토전’으로 불리는 까닭은, 탈식민 시대에도 해외 영토 주권을 정규전으로 재확정하려 한 희귀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냉전 한복판의 전쟁이었지만, 이념보다 영토와 국기, 주민 공동체의 귀속이 목표를 규정했다. 다만 이후에도 식민지 경계 유산이 낳은 분쟁이 계속됐다는 점에서, 해외 식민지 영토를 두고 정규전이 벌어진 거의 최후의 사례라는 좁은 의미에서 성립한포클랜드는 제국이 끝난 뒤에도 제국의 조각이 남아 국제질서의 빈틈을 찌를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전쟁은 과거의 유산이 현재의 정치와 맞물릴 때 어떤 폭발을 낳는지 보여주는 교본으로 남는다.
포클랜드는 탈식민 시대에 ‘해외 영토를 둔 정규전’이 재현된 거의 마지막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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