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버스 시리즈 2편: 시볼트에서 레이지 유니버스까지: 근대 일본의 멜랑콜리한 여주인공의 문화

글목록보기

레이지버스 시리즈 목차

1편 레이지버스(Leijiverse)의 개념과 명칭의 유래 

2025-07-18 (금) 12:00

2편 시볼트에서 레이지 유니버스까지: 근대 일본의 멜랑콜리한 여주인공의 문화

2025-07-25 (금) 12:00

3편 우주의 질서와 신화로서의 여성

2025-08-01 (금) 12:00

4편 21세기 문화적 의미

2025-08-08 (금) 12:00

외전 1 마츠모토 레이지 평전: ‘우주의 신화’를 창조한 남자

2025-08-15 (금) 12:00

외전 2편: 일본 밖에서 재해석된 우주의 신화

2025-08-22 (금) 12:00

 

서론

독일인 의사 필리프 프란츠 폰 시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의 손녀 쿠스모토 타카코(楠本高子)라는 역사적 인물로부터 만화가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의 상징적 캐릭터 메텔(Maetel)이 탄생하기까지의  이야기를 탐구해 본다.

 

이 이야기는  일본이 근대화의 역사, 서구와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대중문화 속 강력한 여성 원형(archetype) 창조를 통해 어떻게 소화하고 재구성했는지 드러낼 수 있다.

 

 

먼저 쿠스모토 이네(楠本イネ)와 타카코라는 실존 인물의 삶을 통해 역사적 사실의 토대를 탐구한다(1부).

다음으로 이들의 이야기가 마츠모토 레이지라는 창작자에 의해 어떻게 창조적으로 변용되었는지 분석한다(2부).

이후, 그 결과물인 메텔이라는 원형을 심층적으로 해부하고(3부),

이 캐릭터를 메이지-다이쇼 시대의 광범위한 문화적 경향 속에 위치시킨다(4부).

마지막으로, 이 원형이 후대 SF 작품에 미친 지속적인 영향을 추적하며 결론을 맺는다(5부).

이 과정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가 시대를 넘어 어떻게 문화적 상징으로 진화하고, 또 다른 창작의 모태가 되는지를 규명할 것이다.

 

1부 역사적 매트릭스: 쿠스모토 이네와 근대성의 도가니

후대 가상 인물들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멜랑콜리'와 '회복탄력성'은 실제 여성들이 겪었던 기록된 투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 역사적 토대를 확립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1.1 시볼트 사건과 그 유산

이 거대한 서사의 발단은 필리프 프란츠 폰 시볼트라는 한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독일인 의사로, 19세기 초 일본의 쇄국 정책 하에 유일하게 서양에 개방된 창구였던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出島)에서 일본의 동식물과 의학을 연구했다. 그는 이곳에서 나가사키 유녀(遊女)였던 쿠스모토 타키(楠本瀧)와의 사이에서 딸 이네를 얻었다.

 

 

그러나 1829년, 시볼트는 일본 지도를 국외로 밀반출하려 했다는 혐의로 스파이로 의심받아 국외 추방령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시볼트 사건'이다. 그는 일본을 떠나면서 타키와 어린 이네를 위해 설탕과 같은 귀한 물자를 남기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을 돌봐줄 것을 당부했다.  

 

시볼트 사건은 이네의 존재를 경계선상의 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존경받는 위대한 학자의 딸인 동시에,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힌 인물의 딸이라는 모순적인 위치에 놓였다. 이는 그녀의 삶을 규정하는 특권과 박해라는 근원적 역설을 형성했으며, 훗날 그녀의 이야기가 신화화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주제적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1.2 경계에서의 삶: 닫힌 세계에서 정체성 탐색하기

 

쿠스모토 이네의 정체성은 여러 겹의 경계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녀는 혼혈, 사생아, 그리고 유녀와 외국인의 딸이라는 여러 층위에서 '아웃사이더'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오란다 오이네(네덜란드 오이네)'라 부르며 그녀의 외국과의 연관성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이네 자신도 푸른 눈과 밝은 머리색 등 남들과 다른 외모와 '혼혈이라는 불리함'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여자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강한 동기로 작용했다.  

 

그녀의 정체성은 단순한 '일본인'이나 '서양인'이 아닌, 데지마라는 위태로운 접점에서 태어난 물리적 현현 그 자체였다. 그녀가 의학의 길을 택한 것은 단순한 직업 선택을 넘어, 자신의 주변부적 지위에서 비롯된 생존 전략이었다.

 

이는 훗날 등장하는 고립되었으면서도 자립적인 여주인공이라는 주제에 강력하고 현실적인 기반을 제공한다.

 

 

1.3 최초의 여성 의사: 모순적인 근대성

쿠스모토 이네는 일본 최초의 서양 의학(난학, 蘭學) 여의사가 되었다. 그녀의 의학 수련은 아버지 시볼트가 남긴 인적 네트워크, 즉 니노미야 케이사쿠(二宮敬作), 이시이 소켄(石井宗謙)과 같은 제자들을 통해 가능했다. 또한 진보적인 영주였던 우와지마 번(宇和島藩)의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로부터 후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서양식으로 의사 면허 제도를 도입한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개혁은 오히려 그녀의 활동을 제약했다. 정규 의학교에서 여성을 배제했기 때문에, 그녀의 지위는 공식적인 '의사'가 아닌 '구식 산파'로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명성은 높아 1873년에는 메이지 천황의 후궁 출산에 참여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네의 경력은 여성을 위한 메이지 근대화의 모순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서양 학문에 대한 관심이라는, 그녀에게 기회를 제공했던 바로 그 힘이 종국에는 서구의 가부장적 제도를 수입함으로써 그녀의 전문적 지위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녀는 출신이나 성별보다 능력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짧은 역사적 순간"에 존재했으며, 그 창은 새로운 메이지 국가가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닫히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네의 삶은 단순한 성공 신화가 아니라, 서양 모델의 채택이 일본 여성의 자율성에 있어 진보가 아닌 퇴보가 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 서사이다. 이는 신유교적 가부장제를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제로 대체하는 과정이었으며 , 근대성에 대한 이러한 복잡하고 비선형적인 경험은 레이지 유니버스에 만연한 멜랑콜리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1.4 사적인 투쟁: 트라우마와 회복탄력성

이네의 공적인 성취 이면에는 깊은 사적 고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의학 수련 중 스승이었던 이시이 소켄에게 임신을 당했는데, 후일 그녀의 딸을 포함한 여러 기록은 이것이 강간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네는 그와 결혼하지 않았고, 딸의 삶에 그가 관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딸의 이름을 '타다(タダ)'라고 지었는데, 이는 '거저'라는 의미로, 하늘이 자신에게 "대가 없이" 내려준 아이라는 상징을 담고 있었다. 비극적이게도 그녀의 딸 타카코 역시 비슷한 운명을 겪으며 자신의 의학도의 꿈을 접어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개인적 트라우마는 이네의 공적 성취 이야기에 심오한 깊이를 더한다. 그녀의 회복탄력성은 단지 직업적인 것을 넘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딸의 이름을 '타다'라고 명명한 행위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개인적 강인함의 서사로 재구성하려는 주체성의 발현이었다. 이 비극이 딸 타카코의 삶에서 되풀이되었다는 사실은, 고통과 투쟁으로 점철된 한 가문의 계보라는 인상을 깊게 하며, 이는 마츠모토 레이지가 훗날 그의 작품 세계에서 포착하게 될 핵심 요소이다.

 

 

2부 연금술적 변용: 한 장의 사진에서 우주적 아이콘으로

이 장에서는 한 장의 사진이 어떻게 우주적 아이콘으로 변모했는지를 추적하며, 마츠모토 레이지를 단순한 작가가 아닌, 그 자신의 철학에 따라 역사적 서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위치시킨다.

 

2.1 마츠모토 철학: 시간의 고리와 운명

마츠모토 레이지의 창작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독특한 철학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 개념을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의 고리(時の輪)' 또는 '0(제로)'으로 형상화한다. 그의 펜네임 '레이지(零士)'의 '零(레이)'는 바로 이 '0'을 의미하며, '士(시)'는 사무라이를 뜻하여 '영원한 사무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신비한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으며, 규슈에서 도쿄로 향하던 마지막 증기기관차를 탔던 경험과 같은 자신의 삶의 체험이 이야기 전체에 숨 쉬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태어난다"는 부친의 말이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고 밝힌 바 있다.  

 

마츠모토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작품을 해석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개별적인 허구로 보지 않고, 거대하고 순환적이며 운명론적인 서사의 상호 연결된 일부로 간주한다. 이러한 세계관은 그가 시대를 초월한 연결고리를 발견하고, 자신의 창조적 충동이 단순한 상상력을 넘어 운명이나 심지어 유전된 기억과 같은 힘에 의해 인도된다고 믿게 만드는 바탕이 된다.

2.2 운명적 만남: 과거로부터 온 얼굴

마츠모토 레이지는 오랫동안 자신이 그리는 여주인공의 구체적인 모델을 알지 못했다. 그 미스터리는 그의 아버지고향 친구가 보여준 한 장의 메이지 시대 사진을 통해 풀렸다. 사진 속 인물은 바로 쿠스모토 타카코였다. 그는 사진을 보고 "망연자실했다"고 회상하며, 그녀가 자신이 15세에서 18세 시절부터 그려왔던 여성과 "눈썹 선부터 완전히 똑같았다"고 깨달았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자신의 "선조의 '기억'" 혹은 "유전자"가 그녀를 그리게 했다고 믿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연금술적 변용의 결정적인 순간이다. 마츠모토는 이 사건을 '영감을 찾은 것'이 아니라 '발견' 또는 '깨달음'으로 규정한다. 그는 이를 자신의 '시간의 고리' 철학에 대한 증거로 여겼다. 즉, 그는 캐릭터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혈통에 각인된 '기억'으로부터 실존 인물을 '복원'해냈다는 것이다. 이 서사는 타카코를 역사적 인물에서 운명적인 뮤즈의 반열로 격상시킨다. 이 발견의 서사는 단순히 메텔의 기원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마츠모토가 어떻게 자신의 작가적 정체성을 과거의 메아리에 독특하게 조율된 선지자적 예술가로 구축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로써 그의 스페이스 오페라는 단순한 공상과학을 넘어선 무게와 장엄함을 획득하게 된다.  

 

2.3 메텔의 탄생: 역사를 신화로 정제하다

 

쿠스모토 타카코는 시볼트의 손녀이자 선구적이지만 비극적인 삶을 산 이네의 딸이었으며, 그녀 자신도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마츠모토의 여주인공들, 특히 메텔은 "가냘프고 신비로운 금발"에 "멜랑콜리와 성숙함"이 깃든 표정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메텔'이라는 이름 자체도 '어머니'를 의미하는 단어(Meta → Meter → Maetel)와 어원적 연관성을 가진다.

 

메텔은 타카코가 남긴 유산의 미학적, 영적 정수이다. 실존 인물의 아름다움, '서구적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혼혈의 외모, 그리고 그녀 가문이 겪은 비극적 역사에서 비롯된 유전된 멜랑콜리는 모두 메텔이라는 허구적 그릇에 부어진다. 은하철도 999호를 타고 떠나는 메텔의 끝없는 슬픈 여정은 쿠스모토 가문 여성들이 보여준 영원한 투쟁과 회복탄력성에 대한 SF적 알레고리가 된다.

 

3부 원형 해부: 메텔의 수수께끼

이 장에서는 원형 분석과 기호학적 분석을 통해 캐릭터 자체를 면밀히 탐구하여 그 의미의 층위를 해부한다.

 

 

3.1 끝없는 여정의 안내자

메텔은 어머니를 잃은 테츠로(철이) 앞에 나타나 기계의 몸을 얻을 수 있는 은하철도 999호의 승차권을 건넨다. 그녀는 테츠로의 동반자이자 보호자로서 위험에서 그를 구출하는 역할을 반복한다. 그녀의 명시적인 목적은 "다른 소년을 미래로 인도하는 것"이며 , 그녀 자신은 "젊은이에게만 보이는 시간의 흐름 속을 여행하는 청춘의 환영"으로 묘사된다.  

 

메텔의 주된 서사적 기능은 영혼의 안내자, 즉 사이코폼프(psychopomp)의 역할이다. 그녀는 표면적으로는 기계의 몸이라는 기술을 얻기 위한 여정으로 테츠로를 이끌지만, 진정한 목적은 그가 인간성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테츠로의 성장을 위한 촉매제이며, '청춘의 끝'을 상징하는 존재다.  

 

 

3.2 위대한 어머니: 양육자와 파괴자

메텔은 테츠로가 잃은 어머니와 놀랍도록 닮은 모습으로 등장하여 즉각적으로 모성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녀는 양육하고 보호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기계 제국의 지배자인 폭군 프로메슘 여왕의 딸로서, 테츠로가 합류하고자 하는 바로 그 시스템의 대리인이기도 하다. 이는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 원형과 정확히 일치하는데, 이 원형은 양육하고 생명을 주는 '선한 어머니(Good Mother)'의 측면과, 모든 것을 삼키고 죽음으로 이끄는 '끔찍한 어머니(Terrible Mother)'의 측면을 모두 포함한다. 메텔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의 어머니와 제국을 파괴하는 것이다.  

 

 

메텔은 이원적인 어머니 원형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그녀는 양육하는 안내자('선한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파괴적인 시스템에 공모하여 소년들을 자신의 어머니, 즉 자식들의 인간성을 집어삼키는 궁극적인 '탐식하는 어머니(Devouring Mother)'의 손에 넘길 수 있는 위험한 존재다. 그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내적 갈등과 반역은 메텔 캐릭터의 중심 비극을 이룬다.  

 

3.3 상복의 여왕: 상징성 분석

메텔은 거의 항상 검은색 털가죽으로 장식된 아스트라한 풍의 코트와 모자를 착용하고 등장한다. 검은색 의복은 전통적으로 애도, 죽음, 권력, 신비, 진지함과 연관된 상징이다. 특히 메이지 시대에 영향을 미친 빅토리아 시대 전통에서 검은색은 애도의 색인 동시에 우아함과 경건함의 상징이기도 했다.  

 

메텔의 검은 옷은 단순한 패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애도하는 인물이라는 지위를 나타내는 지속적이고 시각적인 상징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 여정으로 이끌었던 수많은 소년들을, 잃어버린 자신의 자유를, 기계화로 인해 타락한 인간성을, 그리고 자신의 비극적이고 영원한 존재 자체를 애도한다. 그녀의 의상은 은하계 전체의 잃어버린 인간성을 위한 장례식 수의와 같은 기능을 하며, 그녀를 우주를 여행하는 '상복의 여왕(Mourning Queen)'으로 만든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볼 때, 메텔이라는 캐릭터는 유토피아적 이상에 대한 심오한 비판을 담고 있다. 완벽한 기계의 몸, 즉 기술적 유토피아를 향한 탐구는 영혼 없는 파괴적인 함정으로 드러난다. 메텔은 이 완벽함에 대한 인간적 갈망과 그 끔찍한 대가의 현실 사이에 갇힌 비극적이고 타협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시스템의 '제복'을 입고 있으면서 내부로부터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일한다. 그녀의 비극은 이 순환을 끝없이 반복하며, 기술적 구원이라는 매혹적이지만 궁극적으로 비인간적인 약속에 대한 살아있는 경고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데 있다.

 

 

 

4부 문화적 공명: 근대 일본 속 서구 여성의 유령

이 장에서는 쿠스모토-메텔 계보를 근대화 시기 일본의 다른 여성 표상들과의 대화 속에 위치시켜 분석의 범위를 넓힌다.

 

4.1 문화적 교차점으로서의 '서구풍' 여성

'서구풍 여성(Westernesque woman)'이라는 용어는 외모, 생활 방식, 언어 사용 등을 통해 서구를 연상시키는 일본 여성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쿠스모토 이네와 타카코는 문자 그대로 혼혈로서 이 개념의 물리적 현현이었으며, 메텔은 미학적으로 서구적(금발, 혼혈 모델 기반)이다. 메이지 문학에서 이러한 인물들은 종종 남성 작가들에게 서구에 대한 매혹과 불안을 매개하는 역할을 했다. 나오미, 쿠로다의 모델, 메텔 등은 모두 급변하는 남성 중심 사회의 불안과 욕망이 투사된 '서구풍' 원형의 변주로 볼 수 있다.  

 

4.2 근대성의 거울로서의 팜므 파탈: 메텔 대(對) '나오미'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의 소설 『나오미(痴人の愛)』(1924)는 '서구적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 나오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남성 주인공 조지는 그녀를 세련된 근대 여성으로 개조하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조지를 타락시키고 지배하는 '도미나트릭스(dominatrix)', 즉 팜므 파탈이 되어 서구 문화의 피상적 수용에 대한 풍자적 비판을 체화한다.  .

 

이는 메텔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만약 나오미가 전통적인 일본 남성을 거세하는 타락하고 퇴폐적이며 궁극적으로 공허한 힘으로서의 서구를 상징한다면, 메텔은 보다 비극적이고 낭만화된 비전을 제시한다. 그녀는 타락시키는 자가 아니라, 기계 제국이라는 압도적인 시스템(서구화와 같은 거대한 힘의 은유)에서 태어났지만 고귀함의 핵심을 간직한 슬픈 안내자이다. 나오미가 피상적인 서구화에 대한 비판이라면, 메텔은 거대하고 비극적인 역사 과정 속에서 상실된 인간 영혼에 대한 애가(哀歌)이다.

 

4.3 이상화된 여성: 캔버스에서 셀룰로이드로

화가 쿠로다 세이키(黒田清輝)는 프랑스 유학 후 '일본적 서양화(yōga)'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 『호숫가(湖畔)』(1897)는 유카타를 입은 아내를 호숫가에 앉혀두고 서양의 외광파(plein-air) 기법을 사용하여 '일본적 정서'를 포착한, 세심하게 연출된 구도를 보여준다. 그의 삼부작 『지(智)・감(感)・정(情)』은 서양 아카데미즘의 핵심인 누드화를 통해 '이상화된 일본 여성성'을 묘사하려는 시도였으나, 이는 큰 논란을 일으켰다.  

 

쿠로다의 작업은 일본과 서양을 종합하려는 의식적이고 지적인 프로젝트를 대표한다. 그는 캔버스 위에 이상적인 근대 일본 여성을 적극적으로 '구축'하려 했다. 이는 자신의 이상형을 타카코의 사진 속에서 '발견'했다는 마츠모토의 서사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쿠로다의 이상이 예술적 구성물이라면, 마츠모토의 이상은 운명적 현실로 제시된다. 『호숫가』는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려는 고요하고 수동적인 가정적 이상을 보여주며, 이는 당시 장려되던 '양처현모(良妻賢母)' 이념과 맞닿아 있다. 반면 메텔은 우주적 갈등으로 규정되는 능동적이고 영원히 여행하는 인물로서, 가정이라는 영역을 완전히 거부한다.  

 

근대 일본 문화에서 '서구풍 여성'의 다양한 표상들은 두 가지 상충하는 남성적 판타지 사이의 근본적인 긴장을 드러낸다. 하나는 여성성(그리고 더 나아가 이국적인 것)을 통제하고 '문명화'하려는 욕망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에 의해 지배당하려는 마조히즘적 욕망이다.

 

『나오미』의 조지는 나오미를 자신의 이상적인 서구 여성으로 만들려는 피그말리온적 욕망으로 시작하지만 , 이 판타지는 실패하고 오히려 나오미가 그를 지배하는 마조히즘적 판타지를 충족시킨다. 쿠로다 세이키의 프로젝트는 조지의 초기 충동의 세련된 버전으로, 일본 여성을 서양 미술의 틀에 맞춰 통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반면 마츠모토 레이지의 남성 주인공들은 메텔 앞에서 거의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그녀는 엄청난 힘과 지식을 가진 존재로, 남성을 종속적이고 유아적인 위치에 놓는다. 이 남성 작가들이 창조한 작품들은 여성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가 아니라, 근대성과 서구의 영향에 대한 깊은 문화적 불안이 '이국적/여성적인 것'을 지배하거나 혹은 그것에 지배당하려는 양극단의 판타지를 통해 표현된 결과물이다.  

 
 

5부 끝없는 여정: 마츠모토 여주인공의 유산

이 마지막 장에서는 마츠모토가 창조한 원형의 유령이 후대의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애니메이션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추적하며, 주제와 미학의 직접적인 계보를 주장한다.

 

5.1 멜랑콜리한 복제인간: 메텔과 아야나미 레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綾波レイ)는 주인공 신지의 어머니 유이의 DNA로부터 만들어진 복제인간이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과묵하며, "내가 죽어도 대신할 것은 있다"고 말할 정도로 수동적인 태도로 유명하다. 그녀는 신지를 위한 '모성의 상징'이자 '위안이 되는 어머니 같은 존재'로 설계되었다. 메텔처럼, 그녀 역시 아름답고 수수께끼 같으며, 인류보완계획이라는 거대하고 억압적인 계획과 운명이 묶여 있는 깊은 슬픔을 간직한 인물이다.  

 

 

아야나미 레이는 메텔의 명백한 정신적 후계자이다. 두 인물 사이의 유사점은 뚜렷하다.
  • 인공성: 메텔이 거대한 계획에 봉사하는 조작된 혈통의 일부라면, 레이는 문자 그대로 제조된 복제인간이다.
  • 모성적 역할: 둘 다 외로운 소년 주인공에게 대리모 역할을 한다.
  • 수수께끼 같은 수동성: 둘 다 신비롭고 우울한 침묵으로 정의된다.
  • 실존적 비극: 둘 다 거대한 기계 장치의 소모품 같은 존재로서, 영혼과 정체성의 문제로 고뇌한다.

아야나미 레이는 메텔의 낭만적 멜랑콜리를 가져와 1990년대의 냉철한 정신분석학과 포스트모던 담론의 언어로 재구성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5.2 사이버네틱 셸 속의 고스트: 메텔과 쿠사나기 모토코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의 소령 쿠사나기 모토코(草薙素子)는 뇌, 즉 '고스트(ghost)'를 제외한 전신이 의체화된 사이보그다. 작품의 중심 주제는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그녀는 미래적인 배경 속에서 강력하고 유능하지만 종종 고립된 여성 주인공이며, 그녀의 몸은 인공적으로 제조된 '셸(shell)'이다.  

 

 

미학적으로는 직접적인 복제품이 아닐지라도, 쿠사나기 모토코는 마츠모토 여주인공의 핵심적인 주제적 고민을 계승한다. 테츠로가 메텔과의 여정을 통해 배우는 "기술적으로 진보한 세계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쿠사나기 모토코의 실존적 위기의 중심이 된다. 메텔의 끝없는 운명적 여정에서 비롯된 멜랑콜리는, 쿠사나기 자신의 본질에 대한 모호함에서 비롯된 실존적 고뇌로 변모한다. 두 인물 모두 기술에 의해 자신의 신체/존재로부터 근본적으로 소외된 강력한 여성이다.

 

 

5.3 결론 

 쿠스모토 이네와 타카코라는 실존 인물의 투쟁에서 시작하여 메텔이라는 원형의 창조, 그리고 후대 애니메이션 속 그녀의 후예들에게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니라, 역사가 신화가 되고 그 신화가 다시 미래 세대의 불안을 탐구하는 틀을 제공하는 문화적 피드백 순환 고리이다. 멜랑콜리하고, 서구적 색채를 띠며, 강력하지만 비극적인 여주인공은 근대 일본의 만화 서사에서 매우 견고하고 강력한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