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고구려 멸망 뒤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다시 세워진 북방 국가였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말갈 집단과 결합해 성장했고,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했지만, 한국 고대사에서 만주를 직접 무대로 삼은 마지막 국가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최종 업데이트 2026-03-30
발해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발해의 시작은 고구려 멸망의 뒤처리에서 나왔다. 668년 고구려가 무너진 뒤 대동강 이북과 요동의 고구려 땅은 당의 안동도호부 지배 아래 들어갔고, 고구려 유민은 계속 저항했다. 696년 영주 일대에서 거란 반란이 일어나 당의 통제력이 흔들리자,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이 동쪽으로 이동해 새 거점을 만들었다. 이 이동은 단순한 피난이 아니라, 고구려 멸망 뒤 북방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집단적 재편이었다.
발해는 698년 동모산 기슭에서 세워졌다. 이때의 국호는 처음부터 발해가 아니라 진국으로 이해된다. 이후 당과의 관계 속에서 713년 발해군왕 책봉을 받으면서 발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자리 잡는다. 즉 발해의 건국은 한 번의 선언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라, 고구려 유민의 재집결과 북방 집단의 결합, 그리고 대외 인정을 거치며 완성된 국가 형성 과정이었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자리에서 자동으로 생긴 나라가 아니었다. 고구려 유민의 재결집과 말갈 집단의 결합, 당의 약화라는 조건이 함께 맞물려 만들어진 새로운 북방 국가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잔재가 아니라 고구려 이후를 다시 세운 재건 국가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나라인가, 말갈의 나라인가
이 질문은 발해를 읽을 때 늘 등장한다. 그런데 둘 중 하나만 고르면 오히려 발해의 실체를 놓치게 된다. 발해의 지배층과 국가 계승 의식은 분명히 고구려 쪽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고,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도 스스로를 고려라고 부른 기록이 전한다. 동시에 발해의 영역 안에는 다수의 말갈 집단이 살고 있었고, 건국 과정 자체도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의 결합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발해는 고구려 계승국이면서도, 말갈 세계를 포괄한 복합 국가로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하다. 발해를 오직 고구려의 연장으로만 밀면 내부의 다원성이 사라지고, 반대로 오직 말갈 국가로만 보면 지배층의 계승 의식과 국가 운영의 성격이 흐려진다. 발해는 고구려의 이름과 기억, 말갈의 공간과 인구가 한데 얽힌 북방 국가였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국이면서 동시에 말갈 세계를 포괄한 복합 국가였다.
초기 발해는 어떻게 살아남고 커졌나
건국 직후의 발해는 결코 안정된 나라가 아니었다. 당은 발해를 쉽게 인정하지 않았고, 주변 말갈 집단과의 관계도 단순하지 않았다. 무왕 대에 이르면 발해는 대외적으로 훨씬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다. 흑수말갈 문제를 둘러싸고 당과 긴장이 높아졌고, 732년에는 당의 등주를 공격하는 강경한 장면도 나온다. 이것은 발해가 초반부터 단순히 방어만 한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 북방 질서의 강자로 올라서려 했던 국가였음을 보여 준다.
동시에 발해는 외교를 단순한 전쟁의 반대말로만 쓰지 않았다. 당과는 충돌하면서도 다시 관계를 조정했고,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히 벌였다. 신라와는 경쟁과 긴장이 있었지만 신라도가 열릴 정도로 교통과 교섭의 필요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 초기 발해는 군사와 외교를 함께 굴리며 자기 생존 공간을 넓혀 갔다.
초기 발해는 싸우면서도 교섭하고, 밀어붙이면서도 길을 열며 살아남은 국가였다.
문왕 대의 발해는 왜 국가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나
발해가 본격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는 데에는 문왕 대의 역할이 컸다. 장기 재위 속에서 중앙과 지방 제도가 정비되고, 수도 체계와 교통망, 대외 외교 질서도 훨씬 안정되었다. 발해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그대로 복사하지는 않았다. 중앙은 3성과 6부 체계를 갖추었으나 정당성을 중심으로 운영했고, 지방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발해는 당의 문물을 수용했지만 고구려 계승국으로서의 자의식도 잃지 않았다. 제도는 세련되었고, 운영은 독자적이었으며, 지방 말단은 토착 세력가를 통해 다스리는 방식으로 고구려계 지배층과 말갈 사회 사이의 조화를 꾀했다. 발해는 단순히 큰 나라가 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민 세계를 하나의 국가 체제로 묶는 데 성공한 나라였다.
발해의 성숙은 영토 확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5경 15부 62주의 행정 구조와 3성 6부의 중앙 체제를 갖추며 북방의 복합 사회를 국가로 바꾸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문왕 대의 발해는 북방의 복합 사회를 국가 체제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발해의 전성기는 왜 해동성국이라 불렸나
발해의 전성기는 보통 선왕 대와 그 뒤 수대의 왕 시기로 본다. 선왕은 북쪽 말갈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 요동 쪽까지 진출하며 발해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이 시기를 거치며 발해의 지방제도도 더 완비된 것으로 설명되고, 5경 15부 62주의 틀이 완성된 시점도 보통 이 무렵 이후로 본다. 당 사람들이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불렀다는 표현도 바로 이런 융성기의 인상을 보여 준다.
해동성국이라는 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다. 발해가 북방의 넓은 영역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당·신라·일본·거란과 모두 관계를 맺으며, 교통로와 외교망까지 갖춘 강국으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상경을 중심으로 한 여러 길이 열려 있었고, 일본으로 가는 길, 신라로 가는 길, 당과 거란으로 통하는 길이 모두 국가의 생명줄이었다. 발해의 전성기는 영토만이 아니라 질서와 연결망이 함께 커진 시기였다.
해동성국은 큰 땅만이 아니라 넓은 질서와 연결망을 가진 국가였다는 뜻이었다.
발해 사회와 문화는 무엇이 특별했나
발해 문화는 고구려를 이어받으면서도 당의 세련된 문화를 적극 수용한 점이 특징이다. 고분에서는 고구려계 돌무덤과 말갈계 흙무덤이 함께 보이고, 때로는 당의 영향이 반영된 형식도 나타난다. 즉 발해 문화는 하나의 뿌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고구려 문화가 국가의 중심축을 이루되, 말갈계 요소와 당 문화가 함께 겹쳐지는 복합적 성격을 가진다.
발해가 남긴 문화적 인상은 세련됨과 북방성이 함께 있다는 데 있다. 수도 상경의 도시 구조는 당 장안성의 영향이 보이지만, 지방 통치와 사회 조직에는 토착 세력의 구조가 살아 있다. 이것은 발해가 단순한 모방 국가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발해는 외부 문물을 받아들이되 자기 북방 세계에 맞게 다시 짜 넣는 능력을 가진 나라였다.
발해 문화는 고구려의 계승 위에 말갈과 당의 요소를 겹쳐 만든 복합 문화였다.
강한 발해는 왜 흔들리기 시작했나
발해의 쇠퇴는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문왕 뒤로 왕위 계승 과정에서 내분이 발생했고, 정치적 불안정이 한동안 이어졌다. 한때의 혼란은 선왕이 수습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왕권과 귀족 질서의 긴장이 계속 잠복해 있었다. 강한 국가일수록 내부 균열이 생기면 회복 비용도 커진다.
여기에 외부 환경도 바뀌었다. 10세기 초 만주와 요동의 힘의 중심은 거란 쪽으로 빠르게 기울었다. 발해는 한때 넓은 북방 질서를 조절하던 나라였지만, 거란이 초원과 만주의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방어 부담이 커졌다. 발해의 약화는 내부 불안과 외부 세력 이동이 겹쳐 만들어진 결과였다.
발해의 쇠퇴는 내부 불안과 거란의 부상이 함께 밀어붙인 결과였다.
발해는 어떻게 멸망했나
발해의 마지막은 925년 12월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시작된다. 거란은 짧은 시간 안에 발해를 무너뜨렸고, 926년 초 발해는 멸망했다. 너무 빨랐기 때문에 후대에는 내부 분열, 지배층의 균열, 지역별 이완이 이미 누적되어 있었던 것 아니냐는 해석도 뒤따른다. 어쨌든 결과는 분명했다. 만주를 중심으로 220여 년 존속한 발해 국가는 여기서 독립적 생명을 마쳤다.
하지만 멸망이 곧 소멸은 아니었다. 발해 유민은 여러 갈래로 흩어졌고, 일부는 고려로 들어왔으며, 일부는 후발해 계열 부흥운동을 시도했다.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끌려갔지만, 발해의 이름은 926년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발해 멸망은 왕조의 끝이었지, 사람과 기억의 끝은 아니었다.
926년은 발해라는 국가가 무너진 해이지만, 발해계 유민의 이동과 부흥운동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멸망과 잔존이 동시에 열린 셈이다.
발해는 926년에 멸망했지만, 발해 사람들과 발해 기억은 그 뒤에도 남았다.
발해의 의미는 왜 지금도 큰가
발해의 의미는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발해는 고구려 멸망 뒤 만주를 우리 고대사의 활동 무대로 다시 붙잡은 마지막 국가였다. 둘째, 발해는 고구려 계승성과 말갈 요소가 결합한 복합 국가로서, 북방 국가의 실제 모습이 얼마나 다층적인지를 보여 준다. 셋째, 발해는 한국 고대사가 반도 안에서만 굴러간 것이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까지 시야에 넣어야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발해는 단순한 후삼국 이전의 옛 나라가 아니다. 발해를 넣어야 고구려 이후의 북방 축이 이어지고, 발해에서 멈추는 장면까지 봐야 왜 이후 만주사의 주도권이 거란과 여진, 만주족 쪽으로 넘어갔는지도 선명해진다. 발해는 고구려의 그림자도 아니고, 말갈의 주변부도 아니다. 그것은 한국 고대사의 마지막 북방 제국이자, 동시에 그 북방 축이 꺾이는 경계선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뒤가 아니라 한국 고대사의 마지막 북방 국가라는 점에서 결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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