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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센느 원이 ‘무섭노’ 논란, 일베 감별보다 더 위험한 중장년 담론권력의 청년 낙인

형성하다2026. 7. 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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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센느의 유튜브 콘텐츠에서 나온 “무섭노”라는 짧은 말은 곧바로 정치적 감별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정작 드러난 것은 젊은 아이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과 세대, 콘텐츠의 맥락을 읽지 못한 채 타인의 언어를 판정하려 든 일부 기성 담론의 오만이었다.

청년 언어와 담론권력

‘무섭노’를 심판한 사람들, 청년의 언어를 낙인찍는 기성 담론의 오만

말끝 하나를 혐오의 표식으로 고정하는 순간, 사람과 지역과 콘텐츠의 맥락은 사라진다. 문제는 ‘~노’가 아니라 자신에게 판정권이 있다고 믿은 공적 발언자들의 태도였다.

한마디를 맥락에서 떼어낸 순간

출발은 짧았다. 제작진이 먼저 “무섭노”라고 말했고, 출연자가 같은 표현을 받아 “무섭노. 조명부터 무서운데”라고 덧붙였다.

유튜브 예능과 아이돌 자체 콘텐츠에서는 상대의 말을 반복하고, 즉석에서 리듬을 맞추며, 장면의 분위기를 이어가는 일이 흔하다. 독립된 선언이라기보다 현장에서 나온 받아말하기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그러나 일부 공적 발언자는 앞뒤 대화보다 말끝 하나를 먼저 보았다. MBC경남 PD의 공개 문제 제기에 이어, 노무현재단 이사의 후속 발언까지 더해지면서 논의는 특정 표현의 실제 사용이 아니라 청년층의 일베 문화와 언어 오염을 판정하는 방향으로 커졌다.

한 장면의 맥락은 지워지고, 젊은 세대 전체를 진단하는 재료만 남았다. 말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언어가 아니라 정치적 표식으로 취급됐다.

문제는 표현보다 판정 방식이었다
실제 발화가 어떤 흐름에서 나왔는지를 살피기보다, 말끝 하나를 떼어 특정 정치문화의 증거로 사용했다. 언어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대를 분류한 것이다.

그 장면에서 거제는 왜 사라졌나

해당 콘텐츠는 거제와 리센느, 지역 홍보와 아이돌 팬덤이 만난 자리에서 만들어졌다. 거제시는 전통적인 위촉식에 머무르지 않고 숏폼과 밈, 유튜브와 팬덤 확산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지역 이미지를 새롭게 전달하려 했다.

지역 출신 멤버의 말투와 생활감은 그 기획의 일부였다. 서울의 방송이 지방을 구경하는 장면이 아니라, 지역이 젊은 세대의 언어와 플랫폼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장면에 가까웠다.

그런데 정치적 감별이 시작되자 거제는 사라졌다. 지역 홍보의 새로운 방식도, 아이돌 콘텐츠의 리듬도, 말이 나온 실제 상황도 함께 지워졌다.

지역의 현재형을 읽지 못한 사람들
지역을 말해온 이들이 정작 지역의 젊은 말투와 플랫폼 문법을 알아보지 못했다. 거제에서 만들어진 장면을 서울 정치담론의 낡은 감별표 위로 다시 끌고 갔다.

방언을 존중한다던 담론의 모순

기성 진보 담론은 오랫동안 방언을 삶의 언어라고 불러왔다. 문학과 영화 속 지역어는 중앙의 표준어가 지워온 생활과 기억을 복원하는 언어로 해석됐다.

그러나 방언이 작품 속 미학이 아니라 유튜브와 숏폼, 젊은 아이돌의 말투로 나타나자 태도는 달라졌다. 소설 속 방언은 존중하면서도 현실의 젊은 세대가 변주해 사용하는 언어는 의심했다.

지역성을 옹호한다던 사람들이 지역 언어의 현재형을 견디지 못한 셈이다. 다양성을 말하면서도 자신들의 규범에 들어오지 않는 다양성에는 곧바로 혐오의 표식을 붙였다.

과거의 방언은 미학이었고 현재의 방언은 의심이었다
방언을 존중한다는 말은 쉬웠다. 그러나 지역 출신의 젊은 세대가 실제 콘텐츠 안에서 그 언어를 사용할 때는 존중보다 감별이 먼저 나왔다.

물론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가 일부 말투를 조롱과 혐오의 방식으로 사용해온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표현이 악용된 적이 있다는 사실과, 그 표현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정치적 의도를 부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언어를 판단하려면 억양과 장면, 앞뒤 대화와 관계, 지역과 세대의 사용까지 함께 봐야 한다. 그 과정을 생략하고 말끝 하나만 떼어내면 언어 해석은 감별 행위로 바뀐다.

‘~노’는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비판에 대한 반박 역시 “거제 출신이니 괜찮다”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출신지는 실제 맥락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지만, 그것만으로 표현의 허용 여부를 나눌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경상도 출신이면 사투리, 아니면 일베 의심”이라는 또 다른 검문이 생긴다. 한쪽은 특정 정치집단의 언어라고 독점하고, 다른 한쪽은 특정 지역 사람에게만 허용된 언어라고 제한한다.

혐오 감별과 지역 허가제는 닮아 있다
둘 다 말의 실제 사용보다 출신과 소속을 먼저 묻는다. 언어를 살아 있는 변화가 아니라 신분을 확인하는 표식으로 본다는 점에서 같은 오류를 반복한다.

‘~노’는 일베의 소유물도 아니고 거제의 전유물도 아니다. 지역어와 세대어, 인터넷 말투는 끊임없이 섞이고 변한다. 필요한 것은 소유권 판정이 아니라 사용 맥락을 읽는 능력이다.

이름은 흐리고 낙인은 남겼다

후속 발언에서 나온 “그 가수”라는 표현은 이 논란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름을 말하지 않는 방식은 법적 책임이나 2차 확산을 고려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아는 상황에서 이름만 지우고 “일베식 표현”이라는 판단을 남기면 낙인의 효과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름을 부르면 사람이 생긴다. 팀을 말하면 활동의 맥락이 생긴다. 콘텐츠를 말하면 장면의 구조가 보인다. 그러나 “그 가수”라고 부르면 구체성은 사라지고 도덕적 판단의 사례만 남는다.

책임은 줄이고 효과는 남기는 말하기
대상을 흐린다고 낙인까지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름은 생략했지만 이미지 손상과 정치적 분류는 그대로 남았다.

아이돌은 이미지로 일하는 노동자다. 말투와 표정, 짧은 영상과 검색어가 활동의 조건이 된다. 상승기에 있는 젊은 여성 아이돌에게 정치적 낙인은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생업과 경력에 직접 닿는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 마이크를 가진 사람은 개인 댓글 작성자보다 훨씬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방송사 PD와 변호사, 재단 관계자의 말은 의견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사와 검색어, 커뮤니티의 재생산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만든다.

청년을 혐오세대로 묶어온 오래된 습관

이번 논란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일부 중장년 진보 담론은 오랫동안 20대 남성을 일베화와 혐오, 반페미와 퇴행이라는 단어로 묶어왔다.

병역과 주거, 취업과 계층 하락, 미래 불안 같은 현실을 정교하게 살피기보다 인터넷 문화와 정치 성향으로 세대를 설명했다. 복잡한 청년의 삶은 사라지고, 교정해야 할 혐오세대라는 이미지가 남았다.

이번에는 그 감별의 범위가 젊은 여성 아이돌에게까지 넓어졌다. 남초 커뮤니티의 정치적 발언자도 아닌 사람의 말끝을 청년층의 일베 문화로 연결했다.

젊은 여성은 진보 담론이 보호하는 대상일 때만 안전했다. 그들이 기성세대가 정해놓은 언어와 역할에서 벗어나자, 보호의 언어는 곧바로 감별과 교정의 언어로 바뀌었다.

보호와 통제는 쉽게 뒤집힌다
젊은 세대를 대등한 주체로 보지 않고 보호하거나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면, 기대한 모습에서 벗어나는 순간 낙인이 시작된다.

디지털 팬덤은 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거에는 언론이나 정치권이 누군가를 문제적 인물로 규정하면 해명보다 낙인이 빨리 퍼졌다. 그러나 지금의 팬덤은 주어진 해석을 그대로 소비하지 않는다.

원본 영상을 찾고, 누가 먼저 어떤 말을 했는지 확인하며, 발화 순서와 앞뒤 맥락을 복원한다. 기사 제목과 공적 발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 검증한다.

이번 반발도 단순한 팬심으로만 볼 수 없다. 좋아하는 대상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출발했지만, 그 과정에서 공적 권력이 만든 프레임을 확인하고 반박하는 미디어 문해력이 작동했다.

감별권력과 원본 확인의 충돌
한쪽은 자신의 지위와 권위로 언어의 의미를 판정하려 했고, 다른 한쪽은 원본과 맥락을 통해 그 판정을 검증했다. 이번 논란은 그 두 방식이 정면으로 부딪힌 장면이었다.

스무 살의 철학과 기성 담론의 천박함

이 논란을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천박함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후 공개된 거제 콘텐츠에서 한 젊은이는 어린 시절 고향을 답답하게 여겼고 도시를 동경했지만, 서울에서 살아본 뒤 다시 그곳의 가치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거제에서 태어나겠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그렇다고 답했다. 그 뒤 제작진은 ‘아모르 파티’가 니체의 철학에서 나온 말이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철학적 설명을 듣고 답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출발점과 지나온 삶을 먼저 돌아본 뒤, 이미 같은 삶을 다시 선택했다. 철학은 뒤늦게 그 태도에 이름을 붙였다.

한쪽은 삶을 성찰했고, 다른 한쪽은 말끝을 심판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이는 한때 부정했던 고향까지 포함해 자신의 삶을 다시 선택했다. 반면 공적 지위와 경력을 가진 어른들은 말끝 하나를 떼어 정치적 표식을 만들었다.

천박함은 욕설이나 무지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을 정의의 편이라고 확신하면서도 타인의 삶을 확인하지 않고, 약한 위치의 개인을 자신의 정치적 서사에 이용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직함과 학식이 그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공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의 삶을 납작한 사례로 바꾸는 순간, 권위는 가장 천박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언어

말끝을 표식으로 만들었다

실제 사용보다 정치적 연상을 우선했고, 한 장면을 세대 전체의 문제로 확대했다.

지역

거제의 맥락을 지웠다

지역 콘텐츠의 현재형을 보지 못하고 서울 중심의 정치담론으로 되돌렸다.

권력

공적 지위를 낙인에 사용했다

개인의 말보다 훨씬 큰 확산력을 가진 위치에서 젊은 아이돌을 정치적 사례로 만들었다.

철학

삶을 본 쪽은 오히려 젊은 세대였다

한쪽은 자신의 삶을 돌아봤고, 다른 한쪽은 타인의 삶을 보지 않았다.

이 글에서 끝내야 하는 이유

이 논란을 더 오래 붙들수록 얕은 낙인과 실제 삶이 비슷한 무게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한쪽에는 자신의 과거와 고향을 돌아보고 같은 삶을 다시 선택한 태도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앞뒤 맥락을 지운 말끝 하나와 정치적 단정이 있다.

둘은 처음부터 같은 높이에 놓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긴 반박도, 추가적인 해명도 필요하지 않다. 설명해야 할 것은 젊은 아이돌의 말이 아니라, 공적 마이크를 가진 이들이 왜 그렇게 쉽게 타인의 언어를 심판했는가이다.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결론은 분명하다. 문제는 “무섭노”라는 말끝이 아니었다. 지역과 세대, 콘텐츠의 맥락을 확인하기 전에 자신이 그 언어를 심판할 수 있다고 믿은 일부 기성 담론의 태도였다.

그들은 방언과 다양성을 말했지만 현실의 젊은 언어를 알아보지 못했다. 혐오를 비판한다고 했지만 한 젊은 여성에게 정치적 낙인을 남겼고, 청년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청년을 동등한 주체로 보지 않았다.

반면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이는 자신의 과거와 고향을 돌아보고, 같은 삶을 다시 선택했다. 한쪽은 삶에 철학을 부여했고, 다른 한쪽은 타인의 말에 표식을 부여했다.

무엇이 성찰이고 무엇이 천박함인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