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민원은 어떻게 괴물이 되는가: ‘억울함’과 ‘클릭’이 만났을 때
악성 민원은 어떻게 괴물이 되는가: ‘억울함’과 ‘클릭’이 만났을 때
최근 한 건설 해체 현장에서 고철 자재 수십 톤이 사라졌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유주의 사연이 지역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표면적으로는 안타까운 ‘자재 분실’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복잡하다. 주장과 정황만 있을 뿐, 누가, 어떻게,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혔는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부재한 것이다.
이 사례는 단순한 개인의 민원을 넘어,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악성 민원’의 작동 방식과, 이를 비판 없이 증폭시키는 언론의 책임을 통렬하게 되짚어보게 한다.
1. ‘억울함’이라는 이름의 확신, 왜 반복되는가?
악성 민원은 단순히 성격이 유별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배경이 얽혀있다.
- 첫째, ‘피해자’라는 절대적 자기 확신이다. 일단 자신이 피해자라고 규정한 개인은 모든 상황을 ‘나의 손해’와 ‘상대의 가해’라는 구도로 해석한다. 여기에 복잡한 서류, 여러 기관에 걸친 책임 소재 등 행정 시스템의 장벽이 더해지면, 절차적 안내나 원론적 답변마저 ‘기관의 책임 회피’나 ‘의도적 묵살’로 받아들이게 된다. 개인 대 거대 기관이라는 **‘비대칭적 싸움’**에서 오는 절박함이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 둘째, 넘을 수 없는 ‘입증 책임’의 벽이다. 사법 시스템은 ‘누가, 언제, 어떻게’를 증명할 구체적 증거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의 모든 분쟁이 CCTV처럼 명확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증거 확보에 실패한 당사자는 “분명히 피해는 존재하는데, 왜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가?”라는 심증만으로 공권력 전체에 대한 불신을 키워간다.
- 셋째, 기관의 ‘방어적 행정’이다. 반복되는 민원과 고소에 시달린 기관은 결국 ‘혐의없음’, ‘불입증’과 같은 공문 답변만 기계적으로 반복하게 된다. 이는 민원인의 불신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며, “역시 저들은 한통속”이라는 확신을 강화시킨다. 결국 민원은 더욱 과격해지고, 행정력은 소모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2. 언론, ‘억울함’의 확성기가 되다
이 복잡한 갈등에 언론이 개입하면,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많은 언론이 민원인의 ‘억울하다’는 주장과 제출된 서류 몇 장을 근거로 손쉽게 기사를 생산한다. 이 과정에서 사실관계에 대한 교차 검증이나 법적 쟁점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생략되기 일쑤다.
- ‘피해자 프레임’이라는 흥행 공식: “수십 톤 증발”, “경찰·검찰도 나 몰라라” 같은 자극적인 제목은 독자의 분노와 연민을 자극하며 높은 클릭 수를 보장한다. 이는 언론사의 생존과 직결된 ‘트래픽 경제’의 산물이기도 하다.
- 형식뿐인 반론: 기사 말미에 “경찰 관계자는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불기소 결정됐다고 밝혔다” 식의 한두 줄짜리 반론은, 언론의 객관성을 위한 최소한의 알리바이일 뿐, 진실의 균형을 맞추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결국 언론은 진실을 파헤치는 ‘탐사견’이 아니라, 한쪽의 주장을 널리 퍼뜨리는 ‘확성기’로 전락한다. 사회는 “억울한 시민 = 선(善)”, “무능한 기관 = 악(惡)”이라는 단순한 흑백논리에 갇히고, 진짜 중요한 사실관계는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3. 결국 모두가 패배하는 게임
이런 기사가 단기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검증 없는 민원성 주장이 반복적으로 보도될 때, 그 끝은 사회 전체의 불신과 냉소다.
가장 큰 피해는 공무원 사회의 **‘복지부동’과 ‘방어적 행정’**을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다 악성 민원에 휘말릴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절차와 규정 뒤에 숨어 책임을 피하는 것이 공무원 개인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이는 결국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다른 선량한 시민들에게 돌아갈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4.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제는 ‘악성 민원’을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거나,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 뒤에 숨을 때가 지났다.
언론은 피해 주장만을 받아쓰며 사회적 공분을 유도하는 손쉬운 길에서 벗어나, **사실관계를 집요하게 확인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느리지만 올바른 저널리즘’**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독자 역시 자극적인 기사에 즉각적으로 분노하기보다, 이면의 사실관계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
“억울함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사실은 증명되어야 한다.”
이 당연한 명제가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는 비로소 소모적인 갈등의 고리를 끊고 더 나은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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