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이 짊어진 숭고함과 처절함의 기록: 의사 장기려의 위대한 삶
어떤 삶은 그 자체로 거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의사 장기려의 생은 한 인간이 감당했던 비극과 위대함의 무게를 오롯이 증명하며 그 질문에 답한다. 그의 삶에는 거짓이 없었고, 그 진실은 어떤 허구보다도 극적이고 생생했다.
첫 번째 발걸음: 명예를 버리고 진실을 향하다
1928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자란 한 젊은이는 조선 최고의 명문인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의학도는 대우받는 엘리트였지만, 그는 오로지 의사가 없는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기독교 신념을 품고 있었습니다. 1932년 졸업과 함께 수석의 영예를 안았지만, 그는 곧바로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 박사의 조수가 되어, 박봉과 고된 수련을 감내하며 오직 의술만을 파고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사가 되려는 그의 결심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고난을 자처하는 삶의 서막이었습니다.
의학의 개척자, 그리고 사랑의 혁명가
그의 손은 단순히 메스를 다루는 의사의 손을 넘어, 시대의 한계를 깨부수는 창조자의 손이었습니다. 1943년, 그는 평양에서 한국 최초로 간 설상 절제 수술(간의 윗 조각을 떼어내는 수술)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간암은 곧 죽음이었지만, 그는 수많은 동물 실험과 연구를 거듭하며 인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 불가능에 도전했습니다. 이 성공으로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에게도 인정받는 명의가 되었고, 이 경험은 훗날 그가 남한에서 간 대량 절제 수술을 성공시키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숭고한 정신은 단순히 의술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 때문에 병원 문턱조차 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마침내 1968년, 그는 부산 지역의 23개 교회 단체와 함께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했습니다. "건강할 때 서로 돕고, 아플 때 도움받자"는 그의 철학이 응집된 이 조합은, 당시 담배 한 갑(100원) 값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60원의 월 회비로 운영되었습니다. 조합원들은 의료비의 40%만 부담하고 나머지는 조합과 기부금으로 충당하는 이 제도는 돈이 없어도 누구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위대한 실험이었고,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건강보험 제도의 위대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이별, 그리고 평생의 고통
그의 삶에 드리운 가장 깊은 그림자는 바로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었습니다. 1950년 겨울, 평양 철수 명령이 내려진 비상 상황에서 그는 둘째 아들 가용과 함께 마지막 피난 트럭에 올랐습니다. 그때 멀리서 그를 발견한 아내 김봉숙 여사가 "여보!" 하고 절규하며 불렀지만, 이미 출발한 군용 트럭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달리는 트럭 위에서, 먼지 섞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뒤로 멀어져 가는 아내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는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했습니다. 남한에 온 후, 북한에서 받은 높은 대우 때문에 방첩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하는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평생 가슴에 묻었습니다. 재혼을 권유하는 사람들에게 "내 반쪽은 북에 있다"고 말하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 한 채 없이 병원 옥탑방에서 살았고, "환자들이 낸 돈으로 만든 병원 밥을 먹을 수 없다"며 남은 잔반으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그의 처절한 삶은 신념을 지키기 위한 고통의 길이기도 했지만,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낳은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발걸음
그의 말년은 외롭고 고요했습니다. 1976년 정년퇴임 후에도 그는 병원을 떠나지 못했고, 그가 평생 봉사했던 병원 건물 옥탑방에서 낡은 가운과 청진기만을 벗 삼아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종종 창밖을 보며 멀리 북녘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빛에는 늘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는 80대 노인이 되었을 때도, 의사가운을 입고 부산 영도의 복음병원 복도를 걸으며 가난한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그의 삶을 관통했던 믿음처럼, 병원비 없는 환자에게 병원 뒷문을 열어주던 이야기는 그의 마지막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 12월 25일, 예수님의 탄생일인 성탄절에 그는 평생을 봉사했던 병원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남긴 재산은 단 한 푼도 없었고, 장례식장에는 그가 생전에 고쳐주었던 수많은 이웃들이 찾아와 조용히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그의 삶은 모든 것을 잃으면서도 사랑과 봉사라는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고,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증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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