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 끝의 이름들: 청구에서 고려까지, 중국의 눈과 조선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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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들이 서로를 비출 때: ‘청구·삼한·동이·고려’가 겹쳐 만든 한반도의 자의식

한밤의 등잔불이 흔들릴 때, 조선의 한 사관이 『산해경(山海經)』을 펼친다. 오래된 종이에서 바람 같은 문장이 흘러나온다.

東海之外, 大荒之中, 有青丘之國, 有狐, 其九尾.
동해 바깥, 큰 황야 한가운데 청구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는 아홉 꼬리 여우가 산다.

처음의 ‘청구’는 신화의 가장자리에 놓인 공간이었다.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어딘가를 가리키던 이름은 세월이 흐르며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표지로 이동했고, 마침내 조선을 상징하는 수사로 응축됐다. 신화의 말씨가 방향이 되고, 방향은 시선이 된다.

책장을 더 넘기면 『삼국지』 「위서·동이전」이 보인다. 거기서 한반도 남부를 묶어 부르는 하나의 문장이 단정하게 박혀 있다.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為限, 南與倭接。分爲三,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한은 대방군 남쪽에 있으며, 동서로는 바다에 닿고 남쪽으로는 왜와 접한다. 세 부분으로 나뉘니 마한·진한·변한이다.

중심의 제국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해 이해하려 했다. 다채로운 말과 삶의 결은 ‘세 부분’으로 압축되고, 그 위에 **동이(東夷)**라는 낱말의 그늘이 겹친다. 고대의 또 다른 문헌은 왕화가 사방으로 미친다는 감각을 이렇게 적는다.

東漸于海, 西被于流沙, 朔南暨聲敎訖于四海.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유사에 미치며, 북과 남으로는 성교가 사해에 이른다.

이 말은 중심이 세계의 끝까지 미친다는 상상 위에 서 있다. 그 상상 속에서 ‘동이’는 곧 문명 바깥의 타자를 가리키는 이름이 된다.

고려가 스러지고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오래 남은 것은 입에 붙은 호칭이었다. 명대의 기록은 조선을 이렇게 연결해 서술하곤 했다.

朝鮮, 本高麗地, 國號曰朝鮮.
조선은 본래 고려의 땅이며, 국호를 조선이라 한다.

관성은 바다를 건너 서양 언어의 Korea라는 표기로 굳었다. 이름은 때로 정권보다 오래 산다. 제도와 문장이 바뀌어도 혀끝의 소리는 쉽게 퇴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은 무엇이라 응답했는가. 외교와 제도의 문서에서 조선은 일관되게 스스로를 **‘조선’**이라 불렀다. 국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로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노래를 엮은 책의 표지는 《靑丘永言》, 장인들이 새긴 전국 지도에는 **《靑丘圖》**라는 네 글자가 올라앉았다. 학문과 시를 사랑한 군주가 글 속에서 이렇게 말할 때, 그것은 국호의 변경이 아니라 수사의 선택이었다.

靑丘之地 — 청구의 땅

타자가 건넨 말씨를 빌리되, 그 말씨로 자기 산천을 고상하게 꾸미는 일. 청구는 신화의 황야에서 내려와 강과 들, 비와 바람의 색을 입은 장소가 된다.

오늘의 독자는 그 이름들을 한 겹 더 비판적으로 읽는다. ‘동이’가 남긴 타자화의 그림자, ‘삼한’을 묶어 내려다보던 시선의 높이, ‘고려’라는 관성의 긴 생명, 신화에서 현실의 지명으로 미끄러져 온 청구의 궤적—이것은 중심과 주변이 서로를 호명해 온 역사다. 중심은 명명하고, 주변은 때로 수용하고, 때로 비틀고, 때로 새 이름을 덧입혀 자기 목소리를 만든다.

무비판적 차용은 타자화를 재생산하지만, 맥락을 자각한 인용은 세계관을 드러내고 해체하는 비평의 도구가 된다. 청구는 중국의 눈에서 태어나 조선의 문학에서 자라, 오늘 우리의 독해 속에서 역사적 증거이자 문화적 텍스트로 남는다.

사관은 책을 덮는다. 표지에는 조선이라 적혀 있다. 그러나 속장마다 청구와 삼한과 동이와 고려가 각자의 목소리로 속삭인다. 이름들은 서로를 비추고, 빛과 그림자는 겹쳐진다. 그 겹침 속에서 한반도의 정체성은 더 두꺼워진다.

우리는 이제 그 이름들을 향수로만 부르지 않는다. 신화의 문장, 사서의 기록, 지도의 제목, 노래의 서문을 차례로 더듬으며 묻는다. 이 이름들은 누구의 입에서 시작됐고 누구의 입에서 다시 태어났는가. 오늘 우리가 선택하는 말은 과거의 세계관을 답습할 수도 있고 새롭게 조립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맥락을 잃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한반도는 더 이상 누군가의 동쪽이 아니라, 자기 결을 따라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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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인용과 출전(하단 표기)

  • 『산해경』 「대황북경」
    “東海之外, 大荒之中, 有青丘之國, 有狐, 其九尾.”
  • 『삼국지』 「위서·동이전」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為限, 南與倭接。分爲三,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 『서경』 「우공」 전통 주석 전거로 전해지는 왕화 서술
    “東漸于海, 西被于流沙, 朔南暨聲敎訖于四海.”
  • 명대 사서(명사 「조선전」로 알려진 기술의 요지)
    “朝鮮, 本高麗地, 國號曰朝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