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영화 : ‘필연’이 되는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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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변명 대신, 선택의 자리

우연과 구조, 욕망과 윤리가 촘촘히 맞물리는 순간, 인물은 도망칠 수 없는 결정의 자리에 선다. 박찬욱의 카메라는 그 결정을 보여주는 방식까지 서사로 끌어올린다. 사건을 ‘무엇을 했는가’로 요약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되도록 설계되었는가’를, 그리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함께 묻는다.

프레임 속 프레임: 시선이 만든 감옥

유리, 창문, 문틀, CCTV—그의 프레임은 또 하나의 프레임을 품는다. 인물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때로는 자신의 시선으로 만든 감옥 속에서 움직인다. 수직의 동선(계단, 절벽)은 결심의 경사를, 수평의 이동(바다, 도로)은 미결의 떨림을 만든다. 음악은 사건을 밀지 않는다. 조영욱의 반복 동기와 지연된 현악은 감정이 늦게 따라붙도록 호흡을 조절한다. 그래서 폭력의 순간보다 폭력 이후의 시간—피가 스며들고, 발걸음이 멈추고, 방이 식어가는 여백—이 오래 남는다. 관객이 감정의 주체가 되는 자리다.

비극이 증식하는 법: 초기의 삼부작

〈복수는 나의 것〉—선의의 오답

청각장애인 류의 선택은 악의가 아니다. 그러나 선의의 단서들이 엮이면서, 세계는 잔혹한 연쇄 반응을 시작한다. ‘어쩔 수 없다’는 여기서 도덕의 결핍이 아니라 구조의 어긋남으로 나타난다. 프레이밍은 좁고, 소리는 비어 있다. 관객은 선의의 파국을 목격할 뿐 개입하지 못하는 위치로 고정된다.

〈올드보이〉—우연이 설계가 될 때

우연처럼 시작한 감금은 누군가의 치밀한 연출이었다는 사실로 회귀한다. 최면, 반복, 거울 같은 장치가 인물의 기억과 욕망을 편집한다. 결말의 선택은 악마적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정직한 응시다. ‘어쩔 수 없다’는 고백이 아니라 증언에 가깝다. 이미 설계된 길 위에서 가장 인간적인—혹은 가장 잔혹한—결정을 택하는 증언.

〈친절한 금자씨〉—사적 응보에서 공적 의식으로

금자의 복수는 개인의 카타르시스를 넘어 집단의 의식으로 변환된다. 박찬욱은 응보의 황홀을 허용하되, 그 쾌락이 남기는 법적·윤리적 공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복수의 방은 조문실처럼 정갈하고, 칼보다 긴 것은 침묵의 시간이다. 관객은 금자와 함께 ‘함께 죄를 묻는’ 쪽으로 이동한다.

사랑이 범죄가 되는 방식: 신앙과 욕망의 전도

〈박쥐〉—구원의 반전

“선한 사제”의 구원이 생명 유지라는 폭력으로 전도될 때, 사랑은 신앙의 타락과 공범이 된다. 밤의 색채와 흰 침구의 대비, 피부의 질감과 피의 광택은 윤리의 논쟁을 촉각의 이미지로 바꿔 놓는다.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욕망이 아니라, 관계의 책임을 끝까지 떠안겠다는 결심이다.

〈아가씨〉—텍스트를 찢는 연대

가부장과 식민의 텍스트가 인물의 몸을 표면처럼 훑을 때, 사기극의 구조는 연대로 전복된다. 속임수의 반복은 학대의 반복을 모방하다가, 결국 탈주의 퍼포먼스가 된다. 목욕탕의 하얀 증기, 기름칠된 책의 표면, 날 것의 숨소리는 감금의 미장센을 해방의 리듬으로 바꾼다. ‘어쩔 수 없다’가 ‘이제 이렇게 하겠다’로 변모하는 순간.

〈헤어질 결심〉—사랑은 시선의 책임

형사는 본능적으로 보는 사람이고,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보여주는 사람이다. 산(수직)과 바다(수평)가 엮는 동선은 만남–의심–이별의 파동을 시각화한다. 박찬욱은 여기서 사랑을 욕망이 아니라 시선의 윤리로 정의한다. “어쩔 수 없다”는 사랑의 변명이 아니라, 보는 자가 져야 하는 책임의 문장이 된다.

폭력 이후: 여백의 미학과 관객의 책임

그의 영화가 잔혹하다는 평을 듣는 건 사실이지만, 정작 카메라는 타격보다 사후의 여백을 응시한다. 사건은 한 컷이면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박찬욱은 그 다음 컷—손이 떨리고, 물이 끓고, 바람이 천을 스치는—을 길게 잡는다. 관객은 그 여백에서 자신의 윤리를 꺼내 든다. 응보의 쾌감과 공감의 죄책이 같은 프레임 안에 머무른다.

 

 

 

간단 리뷰

박찬욱의 영화는 사건의 충격보다 결정의 윤리로 관객을 뒤흔든다. 프레임과 동선, 소리와 소도구가 모두 같은 방향—‘어쩔 수 없음이 필연이 되는 자리’—을 가리킨다. 때로는 그 형식적 정확함이 정서의 진입을 어렵게 만들지만, 한 번 들어서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윤리적 서스펜스가 작동한다.

함께 읽기(내부 링크)

출처

  • 한국영상자료원(KOFA) 감독·작품 데이터
  • 칸 영화제 프레스 키트: Thirst(2009), The Handmaiden(2016), Decision to Leave(2022)
  • 『Sight & Sound』(2016) 〈The Handmaiden〉 감독 인터뷰
  • 박찬욱·조영욱 GV/코멘터리 발언 정리(국내 블루레이/시사회 기록)
  • 국내 영화 전문지 박찬욱·스태프 인터뷰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