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구조 ② 재생지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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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지는 친환경 재료로 찬사를 받지만, 실제 출판 현장에서는 종종 더 비싸고 더 위험한 선택지가 된다.

환경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재생지를 써야 하지만, 인쇄 품질에 대한 클레임과 낮은 수요 때문에 출판사는 결국 밝고 매끈한 비재생지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은 그 모순을 ‘재생지의 역설’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한다.

최종 업데이트 2025-11-30

재생지는 왜 말로만 ‘좋은 종이’가 되는가

출판 관련 세미나나 정책 자료에서는 재생지 사용 확대가 빠지지 않는다. 종이를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드는 에너지와 물을 줄이고, 버려지는 종이를 다시 순환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재생지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환경 단체와 인쇄 업계에서도 재생 펄프의 활용이 탄소 배출 감소에 기여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럼에도 실제 단행본과 교재를 펼쳐 보면, 재생지 표기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독자가 만나는 종이는 여전히 밝고 반듯한 비재생지가 대부분이다.

재생지는 찬사를 듣지만, 서점 진열대에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클레임을 두려워하는 출판사와 인쇄소

재생지는 원료 특성 때문에 인쇄 결과가 조금씩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섬유 길이가 짧거나 섞여 있으면 잉크가 스며드는 정도가 달라지고, 종이 표면의 결도 균일하지 않을 수 있다. 인쇄 직후에는 큰 차이가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잉크 가장자리가 살짝 번져 보이거나 색이 미세하게 변하는 경우도 있다. 전문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소재의 특성으로 설명되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글자가 흐리다” “싸구려 종이 같다”는 불만으로 돌아온다. 한 번 찍은 초판에서 이런 클레임이 쌓이면, 출판사와 인쇄소는 다음 책에서 재생지를 다시 쓰기 어렵게 된다.

친환경보다 먼저 계산되는 것은, 불량 책이라는 말을 들을 위험이다.

수요가 적을수록 재생지는 더 비싸진다

종이 값은 원료 가격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생산되는지에 따라 단가가 크게 달라진다. 일반 인쇄용 비코팅지와 코팅지는 교과서와 교재, 전단과 포장까지 대량으로 쓰이기 때문에 공장 설비가 완전히 최적화되어 있다. 반면 재생지는 일정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선별과 가공에 더 많은 손이 들어가고, 특정 인증을 받은 제품이라면 관리 비용까지 붙는다. 여기에 출판 시장에서 재생지를 쓰는 책이 많지 않으면, 재생지만을 위한 대량 생산 라인을 돌리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재생지는 “환경에 좋지만, 소량 특수지라 더 비싼 종이”가 되는 아이러니를 안게 된다.

재생지는 원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안정적인 주문이 없어서 비싼 특수지가 되기 쉽다.

‘친환경 인쇄는 비싸다’는 인식의 정체

시장에서는 종종 친환경 인쇄=비싼 인쇄라는 공식이 반복된다. 재생지와 식물성 잉크, 인증지를 모두 한 번에 바꾸면 당연히 비용이 오른다. 그러나 모든 책이 이런 패키지를 한꺼번에 적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짧은 분량의 기획서나 일부 내지에만 재생지를 쓰고, 나머지는 기존 종이를 유지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소량 인쇄와 주문형 인쇄를 결합하면, 재고를 줄이는 대신 종이 단가 상승분을 흡수할 여지도 생긴다. 그럼에도 “친환경은 비싸다”는 말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많은 논의가 대형 출판사의 대량 발행 기준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친환경이 항상 비싼 것은 아니지만, 가장 큰 규모부터 계산하면 늘 비싸게 보인다.

한국 시장에서 재생지가 특히 어려운 이유

한국 독자는 책의 외형에 민감하다. 표지의 코팅 느낌, 종이의 화이트 톤, 잉크 냄새까지 평가 대상이 된다. 단행본 초판 부수가 크지 않은 시장에서, 한 번의 실험이 실패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출판사의 손실이 된다. 하드커버와 페이퍼백, 문고본으로 나눠 계단을 만드는 구조도 없으니, “친환경 보급판” 같은 실험판을 따로 내기도 어렵다. 결국 재생지를 쓰는 시도는 예술 사진집이나 소규모 기획, 한정판에 묶이는 경우가 많다. 넓은 교양서와 학습서 시장에서는 검증된 밝은 비재생지가 여전히 기본값으로 남는다.

외형 기준이 높은 작은 시장에서는, 한 번의 실패가 다음 재생지 시도를 막아 버리기 쉽다.

재생지 실험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가

그렇다고 실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출판사는 환경 메시지를 앞세운 기획서에서 의도적으로 미색 재생지와 거친 질감을 활용한다. 어떤 책은 광물질을 활용한 특수 종이로, 물에 젖어도 번지지 않는 방수 책을 선보이며 자원 재활용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런 도서는 대량 판매보다는 콘셉트와 상징성을 우선하는 편에 가깝다. 시장 전체를 바꾸기에는 아직 규모가 작지만, 새로운 소재와 인쇄 방식에 대한 노하우를 쌓는 창구 역할을 한다. 재생지와 대체 소재는 이렇게 작은 실험에서부터 조금씩 자기 자리를 찾아 가고 있다.

친환경 종이는 먼저 콘셉트형 소량 기획에서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어떤 책부터 재생지를 써야 할까

재생지 도입은 모든 책에 한꺼번에 적용하는 방식보다는, 위험이 낮은 영역부터 단계적으로 확장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인쇄 선명도와 종이 색에 대한 기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책들이 첫 후보가 될 수 있다. 짧은 에세이나 환경 이슈를 다루는 기획, 내부 교육용 자료, 소량 판매가 예상되는 학술서 등이 그 예다. 표지는 기존 사양을 유지하되, 내지 일부를 재생지로 바꾸거나, 재쇄와 개정판에만 재생지를 적용하는 방법도 있다. 도서관과 공공기관이 재생지 도서를 우선 구매하는 원칙을 세운다면, 출판사가 느끼는 위험도 조금씩 줄어들 것이다.

모든 책이 아니라, 클레임 위험이 낮은 책부터 재생지를 쓰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독자와 출판사가 나눠 가져야 할 책임

재생지의 역설을 풀려면, 품질 기준을 세분화하는 작업이 먼저 필요하다. 글자가 번져 읽기 어려운 책은 분명히 불량이다. 그러나 종이 색이 약간 누렇다거나, 질감이 다소 거칠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싸구려 같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출판사는 재생지 사용 여부와 이유, 예상되는 차이를 책 안에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독자는 재생지 도서를 선택할 때, 책 한 권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비용을 함께 떠올릴 수 있다. 이처럼 기준과 책임을 나누는 과정이 있어야, 재생지는 말뿐인 구호가 아니라 실제 선택지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완벽한 흰색과 완벽한 매끈함만을 기준으로 삼는 한, 재생지는 늘 비정상으로 남는다.

재생지의 역설을 넘어서

오늘날 재생지와 친환경 인쇄 기술은 과거에 비해 꾸준히 발전해 왔다. 문제는 기술이라기보다, 실패 비용을 누가 감수할 것인가에 가깝다. 작은 실험에서 시작해 재쇄와 개정판, 특정 장르와 기획으로 재생지의 영역을 넓혀 간다면, 출판사와 인쇄소가 느끼는 부담도 줄어든다. 독자가 재생지의 질감과 색을 하나의 선택지로 받아들이는 순간, 품질 클레임의 강도 역시 달라질 수 있다. 그 지점이 지나야 비로소 재생지는 역설의 상징이 아니라, 출판 구조 안에 놓인 현실적인 한 계단이 된다. 출판 구조를 바꾸는 일은, 종이 한 장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일에서 출발한다.

재생지가 진짜 선택지가 되려면, 기술보다 태도와 구조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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