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가 설계한 화해, 한국이 치른 대가: 위안부 합의와 촛불·탄핵

글목록보기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는 한미일 안보 구도 속에서 한국과 피해자에게 깊은 굴욕과 불신을 남긴 정치적 거래였다.

이 글은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의 구조를 다시 뜯어보고, 그 배경에 깔린 미국의 안보 구도와 외교 개입을 정리한다. 이어서 위안부 합의 이후 한국 사회의 반발이 어떻게 촛불 집회와 박근혜 탄핵으로 이어졌는지, 국내 정치 타임라인을 따라가며 살펴본다. 그 과정을 통해 한국이 더 이상 같은 방식의 굴욕적 합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까지 점검한다.

최종 업데이트 2025-11-19

 

2015 한일 위안부 합의, 무엇을 약속했나

2015년 12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 직후 양국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른바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했다. 일본 정부는 당시 아베 내각 명의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을 표명하고, 예산 10억 엔을 출연해 한국 정부가 설립하는 재단을 통해 지원 사업을 하기로 했다. 한국 정부는 주한 일본 대사가 발표한 담화를 존중하고, 일본 정부와 협력해 소녀상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합의문에는 국제 재판이나 추가 청구를 포기한다는 직접 문장은 없었지만, 양측이 더 이상 이 문제를 상호 비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취지가 강하게 담겨 있었다. 표면상으로는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의 출발점처럼 포장되었지만, 합의 당일부터 국내에서는 내용과 절차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2015년 합의는 사죄와 재단 설립,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문구를 묶어 위안부 문제에 종지부를 찍으려 한 정치적 합의였다.

 

2015 한일 위안부 합의 구조와 미국의 개입

위안부 합의는 겉으로는 한일 양자 합의였지만, 배경에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깊게 깔려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른바 ‘아시아 재균형’ 전략 아래에서 중국 견제를 위해 미·일·한 삼각 안보 협력을 강화하려 했고, 한일 간 역사 갈등을 안보 리스크로 인식했다. 미국은 2014년 헤이그에서 한미일 3자 정상회담을 주선하고, 도쿄와 서울 방문 때마다 양국 화해를 압박하는 메시지를 공공연히 내놓았다. 합의 발표 직후 백악관과 국무부는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는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며 합의를 환영했고, 동맹 간 협력이 새로운 단계로 들어갈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직접 문구를 작성한 것은 아니더라도, 안보 구도 차원에서 양측을 밀어붙이고 합의를 조기 성사시킨 외부 동인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한 미·일·한 안보 구도를 위해,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동맹 관리 수단으로 밀어붙였다.

 

피해자와 한국 사회가 느낀 굴욕과 신뢰 붕괴

합의의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와 한국 사회의 시각이 거의 반영되지 않은 채, 안보와 외교의 언어로만 설계되었다는 점이었다. 일본 정부의 사죄는 법적 책임이 아닌 ‘도의적 책임’에 머물렀고, 10억 엔 출연은 배상이 아니라 인도적 지원이라는 틀로 묶였다. 합의문에 포함된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문구는, 피해자들이 향후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여지를 스스로 좁히는 자기 구속처럼 읽혔다. 한국 정부가 합의 직후 피해자들을 뒤늦게 찾아가 설명하고, 일본 출연금으로 재단을 서둘러 출범시키는 과정에서 ‘정부와 미국, 일본만 알고 피해자와 국민은 몰랐던 합의’라는 비판이 커졌다. 결국 2017년 출범한 새 정부의 검증 기구는 이 합의가 피해자 중심 접근 원칙에 어긋났다고 결론내렸고, 재단 해산과 사실상의 합의 무력화로 이어졌다.

2015년 합의는 피해자와 국민을 배제한 채 외교·안보 논리로 설계되었고, 그만큼 깊은 굴욕감과 신뢰 붕괴를 남겼다.

 

위안부 합의–촛불–탄핵으로 이어지는 국내 정치 타임라인

위안부 합의는 박근혜 정부의 탄핵을 직접적으로 불러온 사건은 아니지만, 정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중요한 계단 중 하나였다. 세월호 참사 대응 실패와 비선 실세 의혹이 누적되던 상황에서, 2015년 말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를 두 번 상처 입힌 굴욕 외교’라는 인식을 한국 사회에 각인시켰다. 2016년 하반기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폭발하자, 거리로 나온 촛불은 권력 사유화뿐 아니라 위안부 합의와 역사·외교 정책 전반에 대한 분노까지 함께 표출했다. 2016년 10월 말 서울 도심에서 시작된 대규모 촛불 집회는 주말마다 규모를 키워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전국적 시위로 확산되었고, 결국 2016년 12월 9일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이어졌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의 전원일치 탄핵 인용은, 위안부 합의를 포함한 박근혜 정부 전반에 대한 한국 유권자의 불신이 제도적 결론으로 귀결된 순간이었다.

위안부 합의는 세월호·국정농단과 함께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웠고, 촛불과 탄핵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파도의 한 축이었다.

 

촛불이 미국과 일본에 보낸 신호

2016~2017년 촛불 집회와 탄핵 과정은, 한국 내부 정치만이 아니라 동맹국에도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첫째, 피해자와 시민이 동의하지 않은 역사·인권 관련 합의는 설령 정권 간 약속이라 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둘째, 한국 민주주의는 거리의 시민과 헌법 제도가 결합해 대통령을 평화롭게 교체할 정도의 자율성과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셋째, 미국과 일본이 안보와 전략을 이유로 한국 정부에 굴욕적 타협을 요구하더라도, 국내 여론이 이를 거부하면 합의 자체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현실을 확인시켰다. 이후 미국과 일본도 위안부 합의의 파기와 재단 해산 과정을 지켜보며, 한국에서는 역사·인권 문제가 단순한 외교 카드가 아니라 정권의 운명을 바꾸는 변수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촛불과 탄핵은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은 합의는 지속될 수 없고, 한국 민주주의가 정권과 동맹의 한계를 스스로 조정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위안부 합의와 촛불·탄핵의 흐름은, 앞서 정리한 북방 4도 분쟁과 독도 문제: 미·일 동맹과 한국에서 다룬 영토 분쟁 구조와 함께 볼 때 한미일 구도가 한국에 요구해 온 희생의 패턴을 더 선명하게 보여 준다.

 

다시는 같은 합의를 만들지 않기 위한 조건

2015년 합의와 그 붕괴, 촛불과 탄핵의 경험은 한국이 앞으로 어떤 기준으로 역사·인권 문제를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무엇보다 피해자 중심 접근 원칙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협상의 처음과 끝까지 관철되어야 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또한 안보와 외교를 이유로 국내 여론과 의회를 우회하는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편해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합의 그 자체를 무너뜨릴 위험이 크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미국과 일본에게는 한국의 역사·인권 의제가 한미일 안보 협력과 별개가 아니라, 오히려 동맹의 정당성과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는 변수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 내부에서는 합의 과정의 투명성, 국회와 시민사회의 참여, 피해자와의 직접적인 소통을 제도화하여, 어느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같은 방식의 비밀 협상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요구된다.

2015년 위안부 합의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피해자 중심 원칙과 민주적 절차, 동맹국 설득 전략을 동시에 갖춘 장기 설계가 필요하다.

 

참고·출처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의 구체적 내용과 경과는 외교부 직속 검토 태스크포스가 2017년에 발표한 합의 검토 보고서와, 일본 외무성이 공개한 합의 전문을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미국의 역할과 반응은 백악관이 발표한 국가안보보좌관 성명, 국무부의 배경 브리핑 자료, 그리고 미국·일본·한국 주요 언론의 당시 보도를 참고하였다. 합의에 대한 국내외 비판과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문구의 문제점은 인권단체와 연구자들이 발표한 분석 글과 학술 논문을 통해 정리했다. 2016~2017년 촛불 집회와 박근혜 탄핵, 헌법재판소 결정과 이후 정권 교체 과정에 대한 타임라인은 국내외 언론 기사와 헌법재판소 결정문, 국회 의사 기록을 종합해 요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