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의 「패왕별희」 리뷰: 역할과 현실이 뒤섞인 한 사람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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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과 현실이 뒤섞인 몸, 장국영의 디이는 예술과 시대가 한 사람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끝까지 보여준다.

〈패왕별희〉는 경극 무대 위 ‘우희’의 역할과 배우 디이의 현실이 분리되지 못한 채 뒤엉켜 가는 과정을 통해, 예술의 숭고함과 폭력을 동시에 드러낸다. 장국영은 이 인물을 사랑의 비극으로만 좁히지 않고, 역사와 몸 전체를 관통하는 균열로 연기한다. 세기말 홍콩의 종말감도 이 얼굴 위에서 또 한 번 되살아난다.

최종 업데이트 2025-11-25

영화의 틀과 장국영의 디이, 비극이 시작되는 자리

〈패왕별희〉는 진개가 감독이 연출하고, 장국영과 장풍의, 공리가 주연을 맡은 1993년 작품이다. 영화는 북경 경극단에서 자란 두 소년 디이와 샬, 그리고 샬의 아내가 되는 소옥의 얽힌 관계를 중심으로, 1920년대부터 문화대혁명까지 중국 현대사의 폭력을 관통한다. 장국영이 연기하는 디이는 경극에서 ‘우희’를 맡은 단 하나의 몸이자, 현실에서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무대 위에서 그는 완벽한 여인으로 숭배되지만, 무대 밖에서는 성별과 정체성을 설명할 언어조차 가지지 못한 채 시대의 폭력 속을 떠돈다. 영화의 비극은 이 두 세계가 처음부터 완전히 나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패왕별희〉의 비극은 무대와 현실이 처음부터 완전히 나뉘어 있지 않았다는 데서 시작된다.

역할과 현실이 섞인 사람, 디이의 균열

디이는 어린 시절부터 여역을 맡기 위해 강제로 몸과 습관을 교정당한다. 손에 쥔 담배를 뺏기고, 말투를 고치고, “나는 본래 여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강요당하는 순간,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설명하는 언어를 잃는다. 경극단의 스승과 규율은 예술 수련인 동시에, 한 아이에게 “너는 이제 이 역할 말고는 다른 삶이 없다”는 명령을 새겨 넣는 폭력이다. 디이는 그 폭력을 견디기 위해 역할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는 길을 택한다. 우희의 대사를 반복하며 살아갈수록, 그는 무대에서 내려와도 여전히 우희의 감정으로 사랑하고 질투하고 고통받게 된다. 역할과 현실이 섞인 사람의 비극은 이렇게 서서히, 그러나 치명적으로 축적된다.

디이는 역할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는 길을 택한 순간부터 이미 비극을 시작한다.

예술의 숭고함과 폭력, 시대가 한 몸에 새겨지다

〈패왕별희〉의 디이는 개인의 연애 비극을 넘어, 예술과 정치가 한 사람을 어떻게 소모하는지 보여주는 매개체다. 경극단의 고통스러운 훈련과 완벽한 무대, 국난기와 전쟁, 정권 교체와 문화대혁명까지, 모든 사건은 디이의 몸을 지나가며 흔적을 남긴다. 그는 예술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지만, 예술은 그에게 보상을 약속하지 않는다. 시대는 이 몸을 영웅으로 치켜세웠다가, 다시 반혁명분자로 내몰고, 우정과 사랑을 강요된 고백과 배신의 형식으로 찢어 놓는다. 이 과정에서 디이는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을 끝내 가지지 못한 채, 타인이 쥐여 주는 대사와 프레임 속에서만 존재를 유지한다. 예술의 숭고함은 이런 폭력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영화 전체에 길게 드리워진다.

〈패왕별희〉는 예술의 숭고함과 폭력이 한 사람의 몸에서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장국영의 얼굴, 경극과 역사 사이에 끼인 한 사람

장국영의 연기는 디이를 단순한 ‘중성 캐릭터’로 소비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는 제스처와 목소리, 시선의 방향을 통해 경극 무대 위의 우희와, 무대 밖 디이의 불안한 경계를 끝없이 왕복한다. 술에 취해 우희의 대사를 읊을 때와, 샬을 향해 집착과 애정을 동시에 토해낼 때, 장국영은 얼굴을 크게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떨림과 호흡의 끊김만으로, “지금 이 사람이 누구의 말로 말하고 있는지”를 관객이 스스로 느끼게 만든다. 예술을 버릴 수 없고, 시대를 벗어날 수 없고, 사랑조차 역할의 언어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의 비극이 장국영의 얼굴에서 서서히 완성된다. 이 얼굴이 홍콩과 중국 관객 모두에게 오랫동안 남은 이유는, 한 시대의 혼란이 특정 정치 구호보다 이 한 사람의 몸에 더 설득력 있게 새겨졌기 때문이다.

장국영의 디이는 한 시대의 혼란이 한 사람의 몸에 새겨지는 과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세기말 홍콩과 패왕별희, 끝나가는 세계가 보는 한 인물

〈패왕별희〉의 배경은 북경이고, 서사는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지만,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소비된 자리에는 세기말 홍콩의 시선도 겹쳐져 있다. 반환을 앞둔 홍콩 관객에게, 디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과거 중국의 비극이자 “언젠가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혼란”의 전조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미 한 번 역사의 폭력에 휩쓸린 도시가, 또 다른 거대한 전환을 앞두고 다른 시대의 비극을 응시하는 장면이다. 세기말 홍콩의 종말감과 그 얼굴들에 대해서는 〈세기말 홍콩 영화의 종말감: 장국영과 임청하, 두 개의 퇴장〉에서 따로 살펴보았다. 그 글에서 보이듯, 장국영이라는 배우는 홍콩 거리의 청춘에서나 경극 무대의 디이에서나, 끝나가는 세계의 불안을 끌어안은 얼굴이라는 점에서 일관된 좌표를 형성한다.

〈패왕별희〉는 중국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세기말 홍콩이 응시한 또 다른 종말의 얼굴이다.

역할과 현실이 뒤섞인 비극, 무엇이 남는가

영화가 끝날 때, 디이는 결국 우희의 운명을 따라간다. 경극의 대사는 현실이 되고, 역할과 현실 사이의 마지막 경계마저 무너진다. 이 결말은 한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비극적으로 마무리하는 장치라기보다, “역할로만 존재한 인물에게 현실의 삶이 얼마나 허락되었는가”를 묻는 질문에 가깝다. 디이는 예술의 이름으로 칭송받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끝내 갖지 못한다. 그래서 〈패왕별희〉는 감동적인 예술 영화이면서 동시에, 예술과 시대, 역할과 현실이 뒤섞인 사람의 삶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가를 관객에게 되돌려 묻는 작품으로 남는다.

〈패왕별희〉는 예술과 시대에 잠식된 몸을 통해, 역할과 현실이 뒤섞인 삶의 비극을 끝까지 묻는다.

참고·출처

〈패왕별희〉의 1993년 제작 연도, 진개가 감독, 장국영·장풍의·공리 주연이라는 기본 정보와 북경 경극단을 배경으로 1920년대부터 문화대혁명까지를 다룬다는 줄거리 개요는 영화 데이터베이스와 관련 영화사 자료를 참고해 정리했다. 경극 ‘패왕별희’에서 우희 역할을 맡은 배우 디이의 삶과 중국 현대사의 변동이 평행하게 진행된다는 해석 역시 여러 비평과 연구에서 공통으로 언급된 지점을 바탕으로 했다.

장국영이 디이 역을 통해 성별 경계와 예술·정치·역사의 폭력을 한 몸으로 감당하는 인물상을 구축했다는 평가는 〈패왕별희〉 출연 당시 인터뷰, 홍콩·중국 비평가들의 회고, 장국영 필모그래피를 다룬 글들을 종합해 반영했다. 세기말 홍콩의 종말감과 장국영·임청하의 얼굴이 갖는 의미는 별도 글 〈세기말 홍콩 영화의 종말감: 장국영과 임청하, 두 개의 퇴장〉에서 보다 넓은 맥락으로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연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