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언의 책임, 모용의 상처: 두 작품으로 읽는 임청하

글목록보기

임청하는 〈신용문객잔〉에서 끝까지 버티는 의협의 얼굴이 되었고, 〈동사서독〉에서는 사랑이 찢어놓은 자아의 사막을 연기하며 무협의 두 극점을 찍는다.

같은 1990년대 홍콩 무협 안에서 그의 얼굴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확장된다. 하나는 현실의 전장에서 책임을 짊어진 카리스마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의 전장에서 스스로 붕괴하는 초월이다. 두 작품을 나란히 보면 임청하가 무협을 ‘힘의 장르’에서 ‘정서의 장르’로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가 선명해진다.

최종 업데이트 2025-11-25

신용문객잔 속 임청하, 추모언의 생존과 의협

〈신용문객잔〉의 세계는 사막 여관 하나로 압축된다. 국경 끝에서 동창 환관 세력은 사람을 걸러 죽이고, 여관은 그 폭력이 잠시 머무는 중간지대가 된다. 임청하의 추모언은 그 중간지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목적이 있는 사람’으로 서 있다. 남장 검객이라는 외양은 장르적 멋이 아니라, 눈에 띄면 바로 죽는 시대의 생존술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사랑을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는 리더의 얼굴을 갖는다.

임청하는 추모언을 순간의 영웅으로 세우지 않는다. 상대를 겨누기 전에 먼저 읽고, 분노보다 판단이 한 박자 빠르다. 금양옥의 도발이 격정으로 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카리스마는 “나를 보라”가 아니라 “흐트러지지 마라”라는 질서의 힘이다. 그 낮은 질서가 여관의 혼돈을 버티게 한다.

전투 사이사이 드러나는 피로가 이 인물의 진짜 정서다. 숨이 길어지고 어깨가 아주 조금 처지는 순간들이 쌓이면서, 추모언이 즐기는 칼잡이가 아니라 감당하는 칼잡이임이 보인다. 주회안과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질투나 선언 대신, 임무가 끝나면 말하겠다는 유예의 표정만 남긴다. 그 유예가 바로 임청하식 무협 멜로의 깊이다.

결국 추모언은 최후의 사투에서 늪에 빠져 사라진다. 이 죽음은 영웅적 장엄함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침묵으로 처리된다. 임청하는 마지막까지 표정을 크게 열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은 과장 없이 더 크게 울린다. 승패가 아니라 책임이 끝나는 소리 없는 순간으로 남는다.

추모언의 강함은 초월이 아니라 책임과 피로로 완성된 의협이다.

동사서독 속 임청하, 모용의 분열과 사랑의 사막

〈동사서독〉의 사막은 칼날이 아니라 기억이 서로를 찌르는 장소다. 임청하는 모용음과 모용양을 연기하며, 사랑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둘로 찢어놓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인물은 공주와 오빠로 등장하지만, 실은 버림받은 사랑의 상처가 만든 분열된 자아다. 왕가위는 그 분열을 사건이 아니라 감정의 결과로 놓고, 임청하는 그 결과를 얼굴로 설득한다. 설정이 아니라 상처가 먼저 보이게 하는 연기다.

임청하의 차이는 과장된 톤이 아니라 리듬에서 나온다. 모용양은 밖으로 공격하며 걸음이 빠르고 직선적이다. 모용음은 안으로 꺾이며 말끝이 자주 끊기고 호흡이 낮다. 같은 얼굴인데 템포가 다르니, 관객은 두 자아가 아니라 하나의 상처를 본다. 중성의 에너지가 여기서는 권력의 기세가 아니라 붕괴의 증거로 작동한다.

모용이 황약사를 되뇌는 장면에서 임청하는 슬픔을 밀어 넣지 않는다. 대신 공허를 먼저 보여준다. 사랑이 끝난 뒤 남는 건 눈물이 아니라 “내가 누구였는지조차 흐려지는 빈자리”라는 걸, 그 건조한 눈빛이 말한다. 그래서 모용의 분량은 짧아도 영화의 핵심처럼 남는다. 사막이라는 은유가 가장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동방불패가 신화의 초월이었다면, 모용은 상처의 초월이다. 전자는 세계를 장악하는 힘이고, 후자는 세계에 의해 찢어진 뒤에도 남는 힘이다. 임청하는 이 다른 초월을 같은 시대에 동시에 찍어내며 무협의 감정 폭을 넓혔다. 모용의 마지막 잔상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라,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전설로 부숴 버리는지에 대한 공포와 연민이 겹친 얼굴이다.

동사서독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타인의 상처를 중개하는 구양풍이라는 얼굴은 장국영의 '동사서독' 리뷰에서 따로 정리한 바 있다.

모용은 사랑이 낳은 분열이며 임청하가 찍어낸 내면적 초월의 정점이다.

정리, 두 사막이 만든 임청하 무협의 스펙트럼

추모언과 모용은 둘 다 사막에 서 있지만, 사막을 견디는 방식이 다르다. 추모언은 외부의 폭력을 버티며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을 향해 나아간다. 모용은 내부의 상처에 찢기며 끝내 자신이 누구인지도 흐려진다. 하나는 현실적 의협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후유증이 만든 초월의 얼굴이다. 이 두 얼굴이 나란히 서 있을 때, 임청하의 무협 연기가 왜 한 시대의 표준이 되었는지 비로소 완성된다.

임청하의 무협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버팀과 붕괴의 정서로 완성된다.

참고·출처

이 연작은 전쟁 멜로의 침묵에서 시작해 무협의 초월로 번지고, 도시의 잔상으로 닫히는 흐름으로 배치했다. 먼저 임청하의 ‘홍진’ 리뷰에서 떠나보내는 사랑의 윤리를 확인한 뒤, 임청하의 ‘동방불패’ 리뷰로 넘어가 초월과 고독이 맞물리는 순간을 마주하는 순서가 가장 자연스럽다. 이어 임청하의 ‘몽중인’ 리뷰을 통과하면 운명 멜로의 차가운 유예가 명확해지고, 임청하의 ‘백발마녀전’ 리뷰에서 상처가 전설로 변하는 무협 멜로의 정점을 만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은퇴작 ‘중경삼림’ 속 임청하‘추모언의 책임, 모용의 상처’를 나란히 읽으면, 세기말의 도시가 남긴 공기가 이 시리즈 전체를 하나로 묶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