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APEC 이후, 탈세계화와 재편된 동맹 구조의 현주소
2025년 APEC은 탈세계화 시대의 새 판을 드러낸 회의였다.
미·중 경쟁, 보호무역, 공급망 재편이 겹치면서 2025년 경주 APEC은 더 이상 ‘자유무역 확대’가 아니라 ‘위험 관리와 동맹 재배치’가 핵심 의제가 된 회의로 기록됐다. 캐나다 총리가 자유무역 시대의 종식을 선언하고, 중국은 역설적으로 개방과 다자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했으며, 미국은 관세와 투자 딜을 앞세운 선택적 개입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탈세계화는 곧 세계화의 종말이 아니라, 지역 블록과 안보 연계가 강화된 새로운 형태의 재세계화라는 점이 이번 회의에서 분명해졌다.
최종 업데이트 2025-11-26
1. 2025 APEC, 어떤 세계에서 열렸나
2025년 APEC 정상회의는 경주에서 열렸지만, 회의장을 둘러싼 공기는 전통적인 자유무역 담론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공급망 충격이 누적된 뒤, 각국은 이미 자국 우선과 경제안보를 앞세우는 정책으로 방향을 튼 상태였다. 캐나다 총리는 공개 발언에서 규칙 기반 자유무역과 투자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선언했고, 미국은 관세와 투자 협상을 묶은 양자 딜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대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다자주의와 개방 무역 수호를 강조하며, 과거 서방이 맡던 역할을 일부 대신하려는 이미지를 부각했다.
이번 정상회의가 채택한 경주 선언은 표면적으로는 지속가능성, 연결성, 혁신을 내세웠지만, 문장 사이사이에는 공급망 투명성, 디지털 인프라, 경제안보 협력 같은 새로운 키워드가 촘촘히 들어갔다. 예전처럼 관세 인하와 시장 개방을 일괄 약속하기보다, 안보와 기술을 엮은 선택적 개방을 어떻게 조율할지에 더 많은 문단이 할애됐다. 요약하면 2025년의 APEC은 세계화의 확대가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위험 관리형 세계화’를 관리하는 회의에 가까웠다.
2025년 경주 APEC은 자유무역 확대보다 경제안보와 위험 관리가 우선되는 새로운 시대의 단면을 보여줬다.
2. 탈세계화냐 재세계화냐: 공급망이 보여주는 변화
최근 몇 년간 세계 무역을 설명하는 단어는 ‘탈세계화’였지만, 실제 데이터와 기업 전략을 들여다보면 완전한 후퇴보다는 방향 전환에 가깝다. 일부 제조업은 북미와 유럽, 동아시아로 되돌아오고 있지만, 전체 교역량은 크게 줄지 않았고, 오히려 공급망 경로가 더 복잡하고 다변화된 형태로 재구성되고 있다. 유엔 무역기구와 여러 국제기구 분석에 따르면, 2024년 이후 기업들은 단순한 리쇼어링보다 여러 지역에 생산기지를 나누는 분산 전략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멕시코와 베트남이 중간 거점이 되고, 유럽에서는 러시아 비중이 줄어든 대신 미국과 중동, 아시아와의 교역이 늘어나는 식의 재배열이 진행 중이다.
학계와 컨설팅 보고서에서는 이 흐름을 ‘탈세계화’보다는 ‘리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핵심은 무역 자체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전략 물자를 친한 국가와 지역에 나누어 배치해 위험을 줄이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반도체, 배터리, 의약품, 희토류 같은 품목은 단일 국가 의존도를 낮추는 방향으로 정책이 짜이고 있다. 이런 변화는 APEC 2025의 문서에도 반영되어, 공급망 투명성, 데이터 공유, 재해 시 상호 지원 같은 문구가 강조됐다. 결과적으로 탈세계화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와 달리, 실제 세계는 더 다층적이고 불안정한 재세계화 단계로 옮겨가고 있다.
무역은 줄지 않았지만, 전략 품목을 둘러싼 공급망은 한곳이 아닌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는 재세계화 국면에 들어섰다.
3. 동맹 구조 재편: 경제안보 동맹의 부상
2025년의 국제 질서는 군사동맹과 경제 네트워크가 서서히 겹쳐지기 시작한 시기다. 미국은 이미 반도체와 배터리, 청정에너지 분야에서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묶은 법안을 시행하며, 동맹국과 우호국 중심의 공급망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와 반도체 협의체 같은 틀은, 전통적인 군사동맹에 경제안보 레이어를 덧입히는 장치로 작동한다. 유럽 역시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급격히 줄이면서, 미국과 북해, 중동, 북아프리카 쪽으로 에너지 동맹 축을 재편해 왔다.
중국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과 일대일로, 디지털 실크로드를 통해 다른 형태의 경제권을 유지·확장하려 한다. 아세안과 중동, 아프리카 다수 국가는 중국과의 인프라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미국 및 유럽과의 기술·에너지 협력도 유지하는 다중 정렬 전략을 택하고 있다. APEC 2025에서도 이런 복수 정렬 구조가 드러났다. 회의장 밖에서는 미국의 관세와 투자 딜, 중국의 자유무역 수호 발언, 캐나다와 일본의 방어적 재정비가 동시에 진행됐다. 동맹은 더 이상 하나의 선으로 그려지지 않고, 군사·에너지·기술·데이터가 서로 다른 지도 위에서 겹쳐지는 다층 구조로 변해가고 있다.
APEC 이후 동맹은 군사와 경제가 포개지는 다층 구조로 바뀌며, 각국은 여러 지도를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4. 사이에 낀 국가들: 중간지대의 기회와 압력
미국과 중국, 유럽의 재배치 속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는 곳은 이른바 중간지대 국가들이다. 아세안 국가들은 중국과 깊이 연결된 제조·무역 기반을 유지하면서도, 미국과 일본, 유럽의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규제와 인프라를 손질하고 있다. 인도는 독자 노선을 유지하며 서방과 안보 협력을 강화하면서도, 러시아와 에너지 거래, 중국과의 제한적 경제 관계를 병행하고 있다. 걸프 산유국들은 에너지 수출국에서 자본 수출국으로 변신해, 아시아와 유럽의 인프라와 기술 기업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며 새로운 영향력을 쌓는 중이다.
이들 국가는 APEC 같은 다자 무대를 활용해 어느 한쪽에 완전히 줄을 서지 않고, 상황에 따라 카드와 파트너를 바꾸는 전략을 취한다. 그 대신 대가도 분명하다. 어느 쪽과의 관계를 강화하느냐에 따라 다른 쪽으로부터의 관세, 투자 규제, 기술 제재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중간지대는 단순한 완충지대가 아니라, 가장 복잡한 조율과 계산이 필요한 정치경제 공간이 되었다. 2025년 이후 몇 년 동안 이 국가들이 어떻게 줄타기를 하느냐에 따라, 세계 경제의 균형점도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중간지대 국가들은 선택을 미루는 대신, 여러 파트너를 동시에 관리하는 고난도 줄타기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열고 있다.
5. APEC 이후 3~5년을 가를 관전 포인트
2025년 APEC이 보여준 흐름은 당장 세계화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3년에서 5년 사이의 진로를 가늠할 기준점이 된다. 첫째 관전 포인트는 미국과 중국의 관세·보조금 정책이 어느 수준에서 고착되느냐다. 관세와 보조금을 완화하면서도, 핵심 기술과 데이터는 계속 통제하는 ‘부분 완화’ 시나리오와, 제한적 휴전만 반복되는 ‘불안정한 동결’ 시나리오 중 어느 쪽으로 기울지에 따라 투자와 생산의 지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둘째는 공급망 규범과 디지털 무역 규칙을 누가 주도하느냐의 문제다. 인공지능, 데이터 국경, 탄소 규제 같은 분야에서 APEC과 G20, OECD가 만든 합의가 실질 규범으로 자리 잡는다면, 중견국에게도 룰 메이킹 기회가 생긴다.
셋째는 에너지 전환과 안보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재생에너지와 핵심 광물 공급망을 둘러싼 경쟁이 심해질수록, 전통적인 산유국과 자원 부국의 협상력은 더 커진다. 이때 중견국들이 에너지 안보와 기후 목표를 어떻게 조합하는지가 동맹 재편의 또 다른 축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구 구조와 자동화, 인공지능이 노동시장과 복지제도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완충하느냐도 중요하다. 2025년 경주 APEC이 던진 메시지는, 앞으로의 세계가 한 번에 정리되는 하나의 질서가 아니라, 여러 겹의 불완전한 타협 속에서 꾸준히 조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2025년 APEC 이후 세계는 후퇴가 아니라 복잡한 재배치를 시작했으며, 향후 3~5년의 선택이 새 판의 윤곽을 결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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