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실패로도 판이 잘 바뀌지 않는 한국 극장 영화판
극장 관객 수와 매출 규모는 팬데믹 이전보다 눈에 띄게 줄었지만, 한국 극장 중심 상업영화의 의사결정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이 글은 공개된 통계와 산업 구조를 바탕으로, 블록버스터 1세대의 성공 공식이 어떻게 관행으로 굳어졌는지, 새로운 감독을 올리는 계단이 왜 충분하지 않은지, 수익 압박과 OTT 성장 속에서 극장판이 어떤 선택을 해 왔는지를 차분히 정리한다.
최종 업데이트 2025-11-28
1. 관객과 규모는 줄었지만, 구조 변화는 더디게 진행됐다
2019년 한국 극장 관객 수는 약 2억 2천 6백만 명 수준으로,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상 역대 최고치에 가까운 규모를 기록했다. 당시에는 천만 관객을 넘는 작품이 한 해 여러 편 나올 정도로, 극장이 여전히 대중적인 콘텐츠 소비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반면 팬데믹 이후 수년 동안 관객 수는 크게 줄었고, 2024년 누적 관객은 1억 2천만 명 안팎으로 2019년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에 머문 것으로 집계된다. 규모만 놓고 보면, 극장 시장이 이전과는 다른 단계에 진입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제작과 투자, 편성 구조가 급격히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개봉 편수와 예산 규모는 조정되고 있지만, 어떤 작품이 주요 스크린을 차지하는지, 어떤 조합이 상업영화의 기본값으로 여겨지는지는 여전히 2000~2010년대의 성공 사례를 참고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관객 수는 줄었지만, 작품을 고르고 배치하는 기준은 상대적으로 완만하게만 조정된 셈이다. 이 간극이 지금의 답답함을 만드는 요인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관객 입장에서 체감되는 변화도 있다. 극장에 가면 이미 익숙한 배우와 장르, 홍보 문법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고, 이 작품을 굳이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동기를 주는 영화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반대로 OTT에서는 장르 실험이나 형식적인 시도가 더 활발해졌다는 인상을 주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극장판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선택지를 제공하는 대신, 새로운 경험을 제안하는 기능은 다른 플랫폼에 조금씩 넘겨주는 흐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요약하면, 수치상으로는 극장 시장의 규모가 줄었지만, 그 충격이 구조 개편으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실패한 작품 몇 편의 성적이 다음 해의 판을 크게 흔들기보다는, 전체 규모를 조정하는 방향으로 흡수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번의 부진으로 판이 확 바뀌던 시기와는 조건이 달라진 셈이다. 이 차이는 이후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
규모는 급격히 줄었지만 의사결정 구조는 완만하게만 조정된 채 유지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2. 블록버스터 1세대의 성공 공식은 어떻게 관행이 되었나
한국 상업영화의 배급과 상영은 오랫동안 소수의 대형 사업자에 의해 운영돼 왔다. CJ ENM과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NEW 같은 배급사와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멀티플렉스 체인이 극장 시장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구조다. 2000년대와 2010년대 초반까지 이 구조는 장점도 분명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자본이 장르 영화와 블록버스터에 꾸준히 투입되면서, 한국 관객을 겨냥한 대형 프로젝트를 반복적으로 시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괴물,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같은 작품들은 그 시기를 대표하는 예로 자주 언급된다. 당시에는 제작비와 스크린 수, 마케팅을 한꺼번에 동원하는 방식이 새로웠고, 이런 시도가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범주가 형성됐다. 이후 투자와 편성 단계에서는 이 성공 경험이 자연스럽게 기준점이 되었다. 비슷한 예산과 장르 조합, 배우 구성에 대한 선호가 커진 것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흐름이었다.
문제는 이 기준이 시간이 지나면서 관행이자 필터처럼 작동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검토할 때, 이미 홍보와 흥행이 검증된 배우인지, 장르와 설정이 관객에게 익숙한지, 과거에 유사한 조합으로 좋은 결과를 냈던 사례가 있는지가 가장 먼저 논의된다는 이야기가 현장에서 자주 나온다. 이를 두고 “블록버스터 1세대의 성공 공식이 이후 세대의 심사 기준으로 굳어졌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성공 경험이 기준이 되는 순간, 기준 밖의 조합은 상대적으로 진입이 어려워진다.
이러한 구조는 개별 종사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작동하는 측면이 있다. 투자와 편성 담당자가 감당해야 할 책임과 위험을 고려하면, 이미 검증된 조합을 선호하는 선택이 충분히 이해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선택이 반복될수록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감독, 새로운 조합이 상업영화의 중심으로 올라올 수 있는 통로가 좁아지는 효과를 낳는다. 과거의 성공 공식을 계속해서 참고하는 동안, 현재의 관객과 플랫폼 환경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과거의 성공 경험은 자연스럽게 기준이 되었지만 그 기준이 새로운 선택을 거르는 관행으로 굳어졌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3. 감독이 부족하다기보다, 감독을 키우는 계단이 얕아졌다
한국 영화 담론에서는 여전히 박찬욱과 봉준호가 기준점처럼 자주 언급된다. 두 감독은 2000~2010년대에 이미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 잡았고, 이후 작품마다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들 이름이 계속 호출된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후에 등장한 감독들이 상업영화의 중심에서 한 세대를 형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상대적으로 더디게 진행됐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2010년대 이후에도 장편 데뷔작이나 두 번째 작품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감독들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세 번째, 네 번째 작품까지 안정적으로 이어 갈 수 있었는지를 돌아보면, 이야기가 다소 달라진다. 한 번 좋은 성적을 내면 곧바로 시리즈나 확장된 세계관의 한 축으로 편입되거나, 반대로 한두 편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다음 기회까지 긴 공백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감독이 자신의 색을 천천히 다듬을 수 있는 단계가 얕아졌다는 말이다.
장르 영화와 세계관을 결합해 꾸준히 작품을 내는 감독군은 현재 한국 상업영화의 작업 방식을 상징하는 예로 자주 거론된다. 이런 유형의 감독들은 일정한 톤과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산업이 요구하는 제작 일정과 플랫폼 전략에 잘 맞추는 능력을 보여 준다. 산업 입장에서는 신뢰하기 쉬운 파트너이지만, 동시에 이와 다른 결을 가진 감독들이 무대에 오를 기회는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 특정 유형의 연출에 기회가 집중된다는 인상은 여기서 비롯된다.
이런 맥락에서 “감독이 없다”기보다 “감독을 키우는 계단이 부족하다”는 말이 나온다. 여러 감독에게 서로 다른 규모와 조건의 프로젝트를 맡겨 보고, 실패와 조정을 거치며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가 충분하지 않다면, 소수의 이름만 반복해서 언급되는 상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감독에게 더 많은 결정을 맡기자는 논의 역시, 어떤 감독을 어디까지 끌어올릴 것인가에 대한 구조적 논의와 함께 이루어져야 현실성을 가질 수 있다.
감독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다양한 감독이 성장할 수 있는 계단이 얕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4. 수익 압박 속에서 선택은 축소와 안전화 쪽으로 기울었다
극장 관객 규모가 줄어든 상황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상업영화는 여전히 적지 않은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을 필요로 한다. 세트와 CG, 인력 비용, 홍보를 고려하면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위해 필요한 관객 수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거나, 오히려 높아졌다는 분석도 있다. 관객이 분산된 환경에서는 한 작품에 관객을 집중시켜야 하는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개별 작품의 성과가 제작사와 투자사의 다음 행보에 미치는 영향도 그만큼 커진다.
극장을 운영하는 멀티플렉스 입장에서도 상황이 넉넉하지 않다는 점은 여러 보도를 통해 확인된다. 일부 지점은 리뉴얼과 통합, 폐점을 반복하고, 지방 단위의 상영관은 선택지가 줄어든다. 상영관 수와 상영 회차가 줄어들면, 성과가 불확실한 작품이 스크린을 확보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결과적으로 편성은 관객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예상되는 작품 중심으로 구성되기 쉽다. 이는 다시 안전한 조합에 대한 선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업이 취해 온 전략은 대체로 축소와 안전화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제작 편수와 예산을 조정하고, 검증된 시리즈와 리메이크, 이미 알려진 원작에 기반한 프로젝트 중심으로 라인업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소수의 대형 프로젝트와 제한된 수의 중간 규모 작품이 극장판을 채우고, 나머지 영역은 상대적으로 저예산이나 특정 관객층을 겨냥한 작품이 맡는 구조가 자주 반복된다. 새로운 조합을 시험해 볼 여유는 그만큼 줄어든다.
청룡영화상, 가수만 남기고 스태프와 애니를 지운 시상식
수익 구조에 대한 압박 자체는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다만 이 압박에 대응하는 방식이 주로 축소와 안전화에 머무르면, 중장기적으로는 선택지 자체가 줄어든다는 점이 문제로 남는다. 실험적인 작품과 새로운 감독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서, 이미 익숙한 공식이 다시 한 번 선택되는 패턴이 고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기적인 안정과 장기적인 활력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수익 압박은 현실이지만 이에 대한 대응이 축소와 안전화에 치우치면서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5. OTT와 독립영화로 이동한 에너지, 그리고 극장의 역할
지난 몇 년 동안 국내외 OTT 플랫폼은 오리지널 시리즈와 영화를 꾸준히 늘려 왔다. 일부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방송이나 극장 개봉 대신, 처음부터 스트리밍을 전제로 기획된다. 장르적 실험이나 파격적인 소재, 긴 호흡의 서사가 필요한 작품들은 OTT 시리즈에서 더 쉽게 시도되는 경향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 콘텐츠 수출 통계에서도 디지털·온라인 유통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점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독립영화와 예술영화, 다큐멘터리 영역에서도 다양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영화제와 전용관, 소규모 상영회는 새로운 작품과 감독을 소개하는 창구로 기능한다. 다만 상영 기간과 상영관 수가 제한적인 탓에, 이런 작품들이 넓은 관객층과 만날 기회는 여전히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일부 작품은 OTT나 VOD를 통해 두 번째 기회를 얻지만, 이것이 극장 상업영화의 편성 구조를 직접 바꾸는 단계까지 연결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콘텐츠의 에너지는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고 있는데, 극장은 이제 자연스럽게 선택되는 기본값이 아니라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관객은 OTT와 온라인 플랫폼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접한 뒤, 그 가운데 일부만을 골라 극장에서 보는 방식으로 소비 패턴을 조정한다. 이때 극장이 제공하는 경험의 차별성이 뚜렷하지 않다면, 새로운 작품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유인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극장이 앞으로도 의미 있는 창구로 남기 위해서는, 어떤 작품에 상영 기회를 줄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조금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나온다. 이미 여러 플랫폼에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공식과 조합을 반복하는 대신, 극장에서 볼 이유가 분명한 작품을 일정 비율 이상 편성하는 방식이다. OTT와 독립영화, 온라인 프로젝트에서 축적된 실험 가운데 일부를 극장이라는 그릇으로 옮길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된다면, 분산된 에너지와 관객의 관심이 다시 교차할 여지가 생긴다.
콘텐츠의 중심은 분산됐지만 극장이 어떤 작품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여전히 중요한 실험의 장이 될 여지는 남아 있다.
6. 다시 움직이기 위한 조건: 슬롯, 결정권, 선택의 방향
현재 구조가 단기간에 크게 바뀌기는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극장 중심 상업영화판이 다시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 대한 논의가 중요해진다. 첫 번째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연간 라인업 안에 일정 비율의 실험적인 작품을 위한 슬롯을 미리 정해 두는 방식이다. 신인 감독이나 새로운 서사, 비교적 소규모 예산을 위한 칸을 구조적으로 확보하고, 이 칸에서의 성과를 단기적인 손익이 아니라 장기적인 투자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제안이다. 이런 슬롯이 있어야 다양한 시도가 반복될 수 있다.
두 번째는 감독에게 돌아가는 결정권의 범위를 조금씩 넓히는 것이다. 모든 프로젝트에서 감독에게 전권을 주자는 의미라기보다, 규모와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은 작품부터라도 기획과 연출, 후반 작업까지 한 호흡으로 이어갈 수 있는 구조를 늘리자는 취지에 가깝다. 시나리오와 캐스팅, 편집과 마케팅 메시지까지 모든 단계에서 투자와 편성 요구가 과도하게 개입되면, 결과물은 자연스럽게 중간값에 수렴하기 쉽다. 감독별 개성과 서사가 축적되기 위해서는 일정 비율의 프로젝트에서 다른 방식이 시도될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관객과 비평, 글쓰기가 어느 방향에 힘을 실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익숙한 조합의 작품만 꾸준히 선택된다면, 산업은 그 신호를 데이터로 받아들이고 비슷한 기획을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새로운 시도와 다른 결의 연출에 시간을 투자하고, 그 가치를 설명하는 글과 토론이 쌓인다면, 투자와 편성 단계에서 참고할 수 있는 신호가 늘어난다. 개별 관객의 선택과 기록은 단순한 소비를 넘어 다음 해 라인업 구성에 영향을 주는 자료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 영화판을 논의할 때 사용하는 언어도 조금 더 세밀해질 필요가 있다. 지금의 상황을 단순히 낙관과 비관의 구도로 나누기보다, 어떤 구조가 변하지 않고 있는지, 어떤 지점에서 에너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나눠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과거의 성공 공식이 관행으로 굳어지는 과정과, 새로운 선택의 여지가 열려 있는 영역을 함께 살펴볼 때에야 구체적인 대안이 논의될 수 있다. 이 글이 제시한 조건들은 그 가운데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극장 중심 상업영화는 여전히 중요한 창구이지만, 더 이상 자동으로 중심에 놓이는 위치는 아니다.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슬롯과 감독의 결정권, 관객의 선택 방향을 함께 조정할 수 있다면, 한 번의 극적인 사건 대신 여러 해에 걸친 완만한 조정 속에서 판이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금의 정체처럼 보이는 시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 영화판의 모습은 달라질 수 있다.
이 글에서 제시한 조건들은 공개된 통계와 현장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정리한 하나의 해석이며 구조를 바꾸기 위한 여러 논의 중 한 갈래로 이해될 수 있다.
'문화와 예술 > 문화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청룡영화상, 가수만 남기고 스태프와 애니를 지운 시상식 (0) | 2025.11.28 |
|---|---|
| 신구, 생활 연기의 얼굴: 연극에서 드라마·예능까지 한국 연기사 60년 (1) | 2025.11.28 |
|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6,500개 패널로 그린 현대건축 (0) | 2025.11.23 |
| 게티센터로 읽는 현대건축 미학: 순백 모더니즘과 빛, 지형의 공공성 (0) | 2025.11.23 |
| 2025 미국 시장, 봉준호·박찬욱·이병헌·이정재·정호연의 성공과 실패 (1) | 2025.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