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1년, 그날 밤과 그 이후: 쿠데타 시도, 탄핵, 해외 평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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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비상계엄 사태는 6시간짜리 친위 쿠데타 시도와, 이를 되돌려 세운 제도와 시민의 역학이 교차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분기점이었다.

2024년 12월 3일 밤, 전시도 사변도 아닌 상황에서 내려진 비상계엄 선포는 국회와 시민사회의 초단기 대응으로 6시간 만에 효력을 잃었고, 이 충격은 곧 대통령 탄핵과 형사 책임, 제도 개편 논의로 이어졌다.

1년이 지난 지금, 해외 언론과 민주주의 관련 보고서들은 이 사건을 ‘셀프 쿠데타’이자 동시에 ‘민주주의 복원력의 시험대’로 평가하며, 한국이 보여준 빠른 제도적 대응과 그만큼 깊게 남은 신뢰의 상처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최종 업데이트 2025-12-01

긴박했던 6시간: 12.3 비상계엄의 전개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0분대 후반, 용산에서 시작된 한 편의 담화는 불과 여섯 시간 동안 서울 한복판을 전시 상태에 가까운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여섯 시간은 대통령실과 계엄사, 국회와 정당, 그리고 거리와 화면 앞의 시민들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공포를 마주본 시간이었다. 아래 타임라인은 그 밤을 시계 방향으로 되감으며, 민주주의가 실제로 어떻게 무너질 뻔했고 어떻게 버텨냈는지를 세 갈래 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1단계: 기습 선포와 충격 (22:25~23:00)

[대통령실·계엄사]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5분경, 윤석열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긴급 대국민 담화를 시작해 12월 3일 23시부로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화면 속 대통령은 “종북 반국가 세력 척결”과 “자유 헌정질서 수호”를 반복하며, 야당의 예산안 감액과 검사 탄핵을 헌법 파괴와 같은 선에 올려놓았다. 이어 육군참모총장 박안수를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밤 11시 전후 계엄사령부 명의의 포고령 제1호가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 활동, 언론의 자유를 일괄적으로 묶어 제한하는 내용으로 급히 정리됐다. 헌법과 계엄법이 요구하는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라는 요건이 무엇인지, 누구의 어떤 판단으로 충족됐는지는 끝내 명시되지 않았다.

[국회·정당] 국회와 여야 지도부는 텔레비전 자막과 휴대전화 속 속보로 계엄 소식을 처음 접했다.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밤 10시 50분경 유튜브 라이브를 켜 “지금 국회로 가고 있다”며 계엄 해제 의결을 위해 시민과 의원들의 국회 집결을 호소했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 역시 “요건에도 맞지 않는 위헌·위법한 비상계엄”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아내겠다”는 입장을 내고 곧바로 국회로 향했다. 몇 분 사이 여야의 일상적 공방 언어는 사라지고, 헌법 수호를 둘러싼 비상 체제라는 공통 언어만이 남기 시작했다.

[시민사회·여론] 담화가 끝나기도 전에 환율과 주식, 포털과 커뮤니티는 급속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원·달러 환율은 장 마감 이후 급등해 1,440원 선을 넘나들며 2년여 만의 최고치를 찍었고, 한국 관련 ETF와 대형주들은 야간 거래에서 급락세를 보였다. 포털의 주요 뉴스 페이지와 커뮤니티 게시판은 순식간에 ‘계엄’, ‘국회’, ‘쿠데타’라는 단어로 뒤덮였다. 편의점에서는 현금 인출과 생필품 사재기가 일부 지역에서 감지되며, 많은 이들이 “이게 정말 2024년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인가”라는 메시지를 서로에게 보냈다.

2단계: 봉쇄와 대치 (23:00~00:00)

[대통령실·계엄사] 23시를 기점으로 비상계엄 효력이 발동되자, 계엄사령부와 경찰 지휘부는 곧바로 국회와 주요 국가기관에 대한 통제에 나섰다. 밤 10시 50분 이후 서울경찰청과 국회 경비대는 국회 외곽문을 순차적으로 폐쇄하고, 의원과 직원의 출입을 통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국회 사무처와 경비대는 “계엄사령부 지시”라는 말만 반복했지만, 그 지시가 어떤 법적 근거와 보고 라인을 거쳤는지는 누구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여의도 상공에는 군 헬기들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국회 주변에는 장갑 차량과 군용 트럭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국회·정당] 봉쇄가 시작되자 국회의원과 보좌진들은 문자와 단체 메신저를 통해 “지금 바로 국회로 집결하라”는 연락을 주고받았다. 정문과 후문이 차단되자, 야당 의원과 보좌관, 취재진 일부는 어둠 속에서 국회 담장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국민의힘 의원 상당수는 차벽 앞에서 한동안 발이 묶였다가, “당사로 모이라”는 원내지도부 연락에 따라 여의도 중앙당사로 발길을 돌렸다. 그 시각, 본회의장 안에서는 새벽 1시 표결을 목표로 한 시계 맞추기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시민사회·여론] 계엄 선포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늦은 밤임에도 택시와 지하철, 자가용을 이용해 여의도로 몰려들었다. 국회 정문 앞에서는 경찰 버스가 벽처럼 서고, 그 앞에서 시민들이 “문을 열어라”, “국회를 지켜라”를 외치며 첫 대치를 벌였다. SNS 라이브 방송에서는 담장을 넘는 야당 의원들의 모습과 국회 주변에 설치된 차단선, 헬기 소리와 시민들의 욕설과 구호가 실시간으로 뒤섞여 흘러나왔다. 시민들은 아직 어떤 결말이 올지 모른 채, 적어도 “국회 안에서 표결이 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고 있었다.

3단계: 난입과 헌법 수호의 전면 충돌 (00:00~01:00)

[대통령실·계엄사] 12월 4일 0시를 넘기며, 계엄사령부는 특수전사령부 등 무장 병력을 헬기와 차량으로 국회 경내에 투입했다. 언론 타임라인에 따르면 0시 7분경 계엄군이 국회 경내에 진입했고, 0시 20분대에는 본청 앞 계단까지 전개가 완료됐다. 일부 병력은 국회 본청 출입문을 봉쇄하고, 다른 일부는 본회의장 진입을 위한 동선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야간 투시경과 방탄장비, 소총과 곤봉으로 무장한 병력의 행렬은, 헌법기관을 향한 실질적 군사작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국회·정당] 본청 내부에서는 이미 의원과 보좌진, 국회 경위들이 본회의장 주변에 임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있었다. 0시 30분 전후 우원식 의장이 의장석에 착석했고, 본회의장 안팎에서는 “지금 몇 명인가”, “정족수가 채워졌는가”를 확인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0시 40~45분경, 계엄군 일부가 국회 유리창을 개머리판으로 깨고 내부 진입을 시도하자, 경위와 보좌진들은 소화기와 집기를 들고 몸으로 통로를 막아섰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국회 건물 안에서는 “총칼이 먼저 들어올 것인가, 의사봉 소리가 먼저 울릴 것인가”라는 냉혹한 경주가 진행되고 있었다.

[시민사회·여론] 시민들은 국회 본청 유리창이 깨지는 장면과, 곤봉과 방패로 무장한 병력이 본관으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을 생중계 화면으로 지켜봤다. 밤 12시를 넘긴 시각에도 수천 명의 시민이 국회를 에워싸고 서 있었고, 현장과 온라인 모두에서 “이제 정말 쿠데타냐”라는 단어가 공포와 함께 퍼져 나갔다. 일부 시민은 헬기가 국회 마당에 내려앉는 모습을 보고 울분에 찬 욕설을 내뱉었고, 또 다른 이들은 휴대전화로 가족과 친구에게 “혹시 모르니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말라”는 전화를 걸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 존재 자체가 국회 안 표결을 향한 보이지 않는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4단계: 반전의 의사봉, 계엄 해제 결의 (01:00~01:30)

[국회·정당] 마침내 12월 4일 새벽 1시 무렵, 국회는 헌정사에 길이 남을 표결을 시작했다. 출석 215명 중 190명이 표결에 참여했고, 재석 190명 전원이 찬성, 반대와 기권은 0표였다. 숫자만 놓고 보면 만장일치였지만, 본회의장의 110석은 끝내 불이 켜지지 않았다. 그 빈 자리 상당수는 원래 집권 여당 의원들이 앉아 있어야 했던 자리였다. 표결에 참여한 190명 가운데 국민의힘 의원은 18명뿐이었고, 여당의 다수는 그 밤의 결정적 순간에도 본회의장으로 들어오지 않은 채 여의도 중앙당사나 국회 밖에 머물렀다. 일부는 원내지도부의 뒤바뀌는 지시를 따라 당사와 국회를 오가다가, 결국 의사봉이 내려칠 때까지 기표소 안에 서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의사봉이 내려치는 순간, 헌법 제77조 5항 “국회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는 문장은 더 이상 추상적 선언이 아니라 군사력과 맞서는 실질적 무기가 되었다.

[대통령실·계엄사]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가 가결되면서, 대통령실과 계엄사령부는 법적 명분을 한순간에 상실했다. 그럼에도 즉각적인 해제 선언은 나오지 않았고, 용산과 국방부, 계엄사령부 사이에는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를 둘러싼 긴장된 교신이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군 지휘관과 헌병, 정보기관 간부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 작전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판단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헌법이 내려친 브레이크 앞에서, 대통령의 정치적 고집과 군의 조직 논리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시민사회·여론]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은 국회 TV 중계와 휴대전화 속 속보를 통해 계엄 해제 결의 가결 소식을 거의 동시에 들었다. 국회 담장과 잔디밭, 차도 위곳곳에서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고, 일부는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그러나 안도감과 함께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물러서야 한다”는 긴장도 남아 있었다. 시민들은 새벽 공기가 더 차가워지는 가운데서도 자리를 지키며, “군이 완전히 빠질 때까지 집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5단계: 불복의 여운과 병력 철수 (01:30~04:00)

[대통령실·계엄사] 새벽 1시 30분 이후에도 대통령의 공식 계엄 해제 선언은 나오지 않았다. 계엄사령부는 국회 해제 결의 이후에도 일정 시간 병력을 유지하며 상황을 관망했고, 일부 병력은 본회의장 근처 복도와 출입구에 남아 있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새벽 3시 전후부터 국회 경내에 투입된 헬기와 차량, 일부 병력은 단계적으로 철수를 시작했고, 국회 본청 주변에서 무장 병력의 밀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대통령이 결정을 미루는 사이, 군 내부에서는 이미 “이 이상 명령을 밀어붙일 경우 조직 전체가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국회·정당] 국회의원들은 계엄 해제 결의가 가결된 뒤에도 본회의장을 떠나지 않았다. 여야 의원들은 혹시 있을지 모를 재봉쇄와 추가 충돌에 대비해 “해제 선언이 공식 발표될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 시간 동안 여야 지도부와 헌법·형사법 전문가들은 내란죄와 직권남용, 군 통수권 남용 문제를 두고 긴급한 법률 검토를 진행했다. 6시간의 위기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이 사태는 탄핵과 형사 절차로 이어질 것”이라는 인식이 국회 안팎에서 공유되고 있었다.

[시민사회·여론] 시민들은 새벽 두세 시가 넘어가도록 국회를 떠나지 않았다. 일부 시민은 담요와 핫팩을 나눠주며 서로를 부축했고, 또 다른 이들은 휴대전화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라이브 방송 대신 문자와 통화로 소식을 전했다. 외신 기자들 역시 국회 앞과 광화문, 용산 일대에서 시민과 정치인,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생중계하며 “한국 민주주의가 가장 어두운 시험대를 통과하고 있다”고 전했다. 해외에서도 인권단체와 학자, 재외동포 단체들이 잇따라 성명을 내고, 민주주의 후퇴 시도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6단계: 해제 선언과 첫 새벽 (04:00~04:30)

[대통령실·계엄사] 새벽 4시 무렵, 용산에서는 뒤늦은 수습 시나리오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국무회의가 소집되어 계엄 해제안이 의결됐고, 4시 30분경 방송을 통해 중계된 담화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수용한다”며 계엄 해제 사실을 공식화했다. 불과 여섯 시간 전만 해도 국회를 향해 진격하던 군 병력이, 이제는 같은 헌법 조항을 근거로 다시 병영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국회·정당] 국회는 대통령의 해제 선언이 공식 확인되자 비로소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의원들은 곧바로 자리를 뜨기보다는 사태의 전말과 책임 소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착수했다. 회의록과 속기록, 영상 자료, 출입기록과 CCTV, 통신 기록 등 그 밤의 흔적을 어떻게 보존하고 조사에 넘길 것인지가 논의되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이것은 일회성 정치적 사고가 아니라, 헌정을 파괴하려 한 중대한 시도”라는 인식이 확고해졌고, 이후 탄핵과 형사 재판으로 이어지는 긴 1년의 서사가 이 새벽 국회에서 시작되었다.

[시민사회·여론] 시민들은 새벽 4시대 텔레비전 화면에 뜬 “비상계엄 해제” 자막을 확인하고서야 하나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출근길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는 누군가가 밤사이 벌어진 일을 설명하면, 다른 누군가가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되묻는 풍경이 이어졌다. 해외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 사태를 “실패한 친위 쿠데타 시도”, “의회와 시민에 의해 되돌려진 자기 쿠데타”로 평가하며, 여섯 시간 동안의 분노와 용기, 저항을 한국 민주주의가 치른 가장 극적인 시험으로 기록했다. 한국 사회는 피를 흘리는 대규모 유혈 사태 없이 쿠데타의 문턱에서 돌아섰지만, 그날 새벽 이후 “민주주의는 결코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집단 기억 속에 깊이 새겨졌다.

12.3 비상계엄의 여섯 시간은 한 사람의 오판이 어떻게 헌정을 무너뜨릴 뻔했는지, 그리고 국회·군·시민이 어떻게 그 오판을 되돌렸는지를 동시에 보여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압축된 시험대였다.

2. 사건 직후 3개월: 사과, 탄핵, 그리고 거리의 분열

비상계엄이 형식상 해제된 뒤에도 정치적 위기는 계속되었다. 12월 4일 새벽, 국내 주요 일간지는 일제히 사설을 통해 이번 계엄 선포를 “헌정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규정했고, 방송사와 언론노조, 종교계·학계 성명도 잇따랐다. 같은 날 저녁과 이후 주말마다 서울과 주요 도시에 대규모 촛불 집회가 열리며, 대통령 사퇴와 탄핵을 요구하는 구호가 쏟아졌다.

12월 7일, 윤석열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며 “절박한 국정 상황에서 나온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취지로 인정하면서도, 계엄 선포를 “국민에게 상황을 알리기 위한 호소의 형식”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동시에 “반국가세력에 대한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기존 입장을 거두지 않고, 스스로를 “헌정 질서 수호를 위해 싸운 대통령”이라는 서사 속에 위치시키려 했다. 며칠 뒤에는 계엄을 “통치 행위”로 정당화하며 “끝까지 싸우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국민 여론은 빠르게 악화되었다. 주요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0% 안팎이 계엄 선포를 “내란에 준하는 행위” 혹은 “하야·탄핵 사유”로 본다고 답했고, 대통령 지지율은 10% 초반대로 추락했다. 반면 당시 여당 지지층 일부에서는 “야당의 탄핵 남용과 국회 발목잡기가 사태의 원인”이라는 인식도 강하게 나타나, 광장과 온라인 공간은 탄핵 촉구 집회와 맞불 집회가 공존하는 풍경을 보여주었다.

국회는 계엄 해제 다음 날부터 탄핵 논의에 착수했다. 12월 7일 첫 번째 탄핵소추안이 상정됐지만, 여당 의원들의 대거 불참으로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표결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다. 그러나 12월 14일 두 번째 탄핵소추안이 재상정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계엄 선포 과정에서 국무회의 심의·의결이 형식에 그쳤다는 점,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했다는 점, 입법부와 선관위에 대한 무력 압박을 지시했다는 의혹이 핵심 쟁점으로 제기되었고, 12월 3일 밤 당사와 국회 사이를 오가며 갈팡질팡했던 여당의 발걸음은, 본회의장 기표소 안에서 ‘찬성’ 쪽 란에 도장을 찍는 손떨림으로 이어졌다. 대통령을 지키기에는 명분이 없었고, 국민을 등지기에는 두려움이 더 컸다. 일부 여당 의원들의 이탈표가 더해지면서 탄핵소추안은 재적 300명 가운데 204명 찬성, 85명 반대, 나머지 기권·무효로 가결되었다.

탄핵안 가결과 동시에 대통령 권한은 정지되었고, 국무총리 한덕수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이후 한덕수 총리마저 계엄 관련 책임 공방 속에서 탄핵 소추를 당했다가 헌법재판소의 기각 결정으로 복귀하는 등, 행정부 수반 직위는 몇 주간 ‘임시·대행 체제’ 속에서 흔들렸다. 이러한 정치적 불확실성은 금융시장 변동성과 외교·안보 정책 공백에 대한 우려로 이어지며, 12.3 사태가 단순히 하나의 밤을 넘어 장기적인 국정 위기로 번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계엄 해제 직후의 3개월은 대통령의 정당성을 둘러싼 거리의 심판과, 헌법이 준비해 둔 탄핵 절차가 동시에 작동한 시기였다.

3.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과 이후 1년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로 회부되면서 12.3 사태는 ‘정치적 논쟁’에서 ‘법적 판단’의 단계로 옮겨갔다. 헌법재판소는 2025년 1월 첫 변론기일을 시작으로, 계엄 선포 과정과 군·경 동원, 국회·선관위에 대한 압박, 이후 수사와 증거 인멸 의혹까지를 포괄해 심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국무회의 참석 장·차관, 국방부와 합참 관계자, 국회 경위와 군 장교, 대통령실 관계자와 보좌진 등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2025년 4월 4일 (금) 오전 11시 22분,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인 전원 일치 의견으로 탄핵 인용, 즉 파면 결정을 선고했다. 결정문은 계엄 선포가 국회의 입법·감시 기능을 군사력을 통해 제약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보았고, 국무회의 심의·의결이 형식적 수준에 그친 점, 군의 정치적 중립 의무와 국민의 기본권을 중대하게 침해한 점을 중대한 헌법 위반으로 판단했다. 특히 입법부와 선관위를 계엄군의 통제 대상으로 삼은 점은 “민주공화국의 근간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취지로 적시되었다.

이 결정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은 즉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고, 향후 5년간 공직 취임이 제한되는 신분이 되었다. 한덕수 권한대행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헌법이 정한 대로 60일 이내 조기 대선 일정이 확정되었다. 이어 치러진 대선에서 야당 지도자였던 이재명이 당선되면서, 한국 현대사에서 두 번째로 탄핵으로 파면된 대통령과, 그 뒤를 잇는 정권 교체라는 이례적인 장면이 완성되었다.

형사 책임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내란과 관련된 혐의를 포함한 여러 형사 혐의가 병합된 재판이 진행 중이며, 전직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 당시 계엄사령부 지휘부, 일부 치안·정보 라인 고위 공직자들도 군형법상 반란 관련 조항과 형법상 직권남용·직무유기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전직 국무총리를 포함한 일부 국무위원들 역시 계엄 관련 책임을 두고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어, 12.3 사태에 대한 형사적 책임 소재를 둘러싼 심판은 1년이 지난 현재도 법정에서 계속되고 있다.

입법·제도 개편 논의도 뒤따랐다. 국회에는 “계엄 선포 요건을 보다 엄격하게 제한하고, 국회·선관위·법원 등 헌법기관에 대한 군 동원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계엄법 개정안과, 12.3 사태 관련 반헌법 행위자를 별도로 정리·평가하는 특별법안 등이 발의되었다. 또한 대통령의 군 통수권 행사에 대한 국회 통제 장치를 강화하고, 국방부·합참의 계엄 관련 문건과 지휘 체계를 상시적으로 점검하는 상설위원회 설치 논의도 함께 진행되었다.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과 후속 수사·입법 과정은, 12.3 사태를 단순 해프닝이 아니라 헌정 질서를 위협한 중대 위반으로 확정하는 집단적 기록 작업이 되었다.

4. 해외 언론이 본 12.3 사태: ‘셀프 쿠데타’와 ‘스트레스 테스트’

12.3 사태 직후, 해외 주요 언론과 연구기관들은 이 사건을 한국 내부 문제를 넘어 민주주의 연구의 대표 사례로 다루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 매체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가 헌정 질서를 거슬러 권력을 연장하려 한 사례”라는 점에 주목하며, 이를 스페인어권 정치학 용어인 ‘오토골페(autogolpe)’, 영어로는 ‘셀프 쿠데타(self-coup)’라고 소개했다. 자국 군을 동원해 의회와 선관위를 압박한 점에서 과거 군사 쿠데타들과 유사한 패턴을 보이지만, 그 과정이 헌법과 법률의 언어를 빌려 포장되었다는 점에서 21세기형 자기 쿠데타의 전형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AP통신과 영국·독일의 주요 일간지, 동아시아 연구 싱크탱크들은 12.3 사태를 “6시간짜리 권력 찬탈 시도이자,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의 복원력을 시험한 사건”으로 평가했다. 이들은 계엄 선포 직후 국회가 수 시간 내에 본회의를 열어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시민들이 국회 주변에 모여 의사 진행을 보호한 장면을 상세히 전하면서, 제도와 시민사회가 결합해 셀프 쿠데타를 무산시킨 ‘예외적 실패 사례’라고 설명했다. 많은 기사에서 광주민주화운동과 12·12 군사반란, 5·18의 기억이 이번 사태에 대한 한국 시민의 즉각적 반응을 이끈 역사적 배경으로 언급되었다.

동시에 해외 언론과 인권 단체들은 이 사태가 한국의 국제적 신뢰도와 민주주의 지표에 남긴 상처도 지적했다. 몇몇 민주주의·언론 자유 관련 연례 보고서는 12.3 사태를 한국의 자유·권리 후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별도 언급하며, 향후 평가에서 이를 위험 요인으로 반영하겠다고 경고했다. 일부 경제 매체와 국제기구는 차기 민주주의 지수 평가에서 한국이 ‘완전한 민주주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고, 언론 자유 평가 단체들은 이미 이어져 오던 순위 하락과 맞물려 12.3 사태를 권력기관의 언론 통제 시도가 노골화된 정점으로 소개했다.

2025년 4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 이후 외신의 톤은 다소 달라졌다. 미국·유럽 주요 매체들은 “헌법재판소가 만장일치로 대통령 탄핵을 인용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12.3 사태를 “위기 이후 제도가 스스로를 정정한 사례”로 정리했다. 동시에, 전직 대통령이 내란 관련 혐의로 재판을 받는 상황과 정치권의 극단적 양극화, 거리의 대규모 집회가 반복되는 현실을 짚으며, “민주주의가 작동했지만 상처는 깊고,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중한 평가를 내놓았다.

12.3 사태는 한국에 대한 외교·안보 평가에도 흔적을 남겼다. 일부 국제 관계 분석 보고서는 동맹국이자 민주주의 파트너로서의 한국이 보여준 제도적 저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집권 세력의 셀프 쿠데타 시도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앞으로의 리더십 리스크”로 분류했다. 동시에, 윤석열 탄핵 이후 들어선 이재명 정부가 1주기를 맞아 어떤 메시지와 제도 개편을 내놓을지, 한국이 위기 이후 어떤 민주주의 모델을 보여줄지에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해외 언론은 12.3 사태를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복원력을 동시에 드러낸 셀프 쿠데타 시도로 기록하고 있다.

5. 1년 뒤 돌아본 12.3: 취약성과 복원력이라는 두 얼굴

12.3 비상계엄 사태는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복원력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으로 남았다. 대통령 한 사람과 소수의 참모, 군 지휘부가 짧은 시간 동안 비밀리에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가 곧바로 군사력 동원과 계엄 선포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헌법과 법률이 문자 그대로 존재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민주주의가 보호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권력 집중 구조와 안보 레토릭, 반공 이데올로기가 결합할 때 제도는 언제든 위험한 방향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그날 밤과 이후 1년의 전개는, 한국 사회가 1987년 체제 이후 쌓아 온 방어 장치들이 작동했다는 점도 함께 증명했다. 국회는 몇 시간 만에 본회의를 열어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시민들은 국회와 거리에서 헌정 질서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며 입법부의 결정을 뒷받침했다. 사법부는 탄핵 심판을 통해 대통령의 위헌적 행위를 공식 기록으로 남겼고, 언론과 학계, 시민사회는 사건의 맥락과 책임을 추적하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장기적 기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

12.3 사태 1주기는 그래서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질문의 계기로 남는다. “그날 밤 국회가 뚫렸다면,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어떤 신문을 받아들었을까”, “만약 국회가 계엄 해제 결의를 하지 못했다면, 헌법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라는 가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질문들에 대한 상상을 통해, 한국 사회는 계엄법과 군 통수 구조, 언론·사법·입법의 견제 장치를 더 촘촘히 손봐야 할 지점을 찾아가고 있다.

한 번 실패한 쿠데타 시도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12.3 사태를 둘러싼 1년의 시간은, 대통령 탄핵과 전직 권력자들에 대한 형사 재판, 민주주의 지표 하락에 대한 우려라는 뼈아픈 대가와 동시에, 제도와 시민이 결합하면 친위 쿠데타조차 실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경험을 남겼다. 12.3 사태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날 밤의 공포만이 아니라 그 공포를 되돌려 세운 절차와 시민의 역할까지 함께 기억하는 일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 1주기는, 쿠데타 시도의 밤과 그 이후 1년간의 복원 과정을 함께 응시하며 제도를 제대로 손보라는 요청으로 남아 있다.

6. 오지 않은 또 하나의 타임라인: 계엄이 성공했다면

이제 상상해 본다. 단 하나의 변수만 다르게 놓고, 2024년 12월 3일 밤 국회 봉쇄와 계엄군 난입이 온전히 성공했더라면 어떤 아침이 찾아왔을지에 관해. 전제는 단순하다. 국회 본회의가 열리지 못했고, 계엄 해제 결의는 표결조차 되지 못했으며, 야당 지도부와 일부 언론인들은 그날 밤 바로 연행되었고, 군과 경찰 내부에서 즉각적인 대규모 항명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가정이다.

그 경우 12월 4일 아침, 시민들은 평소처럼 출근 준비를 하며 TV를 켰다가 “계엄사령부의 특별담화”를 맞이했을 것이다. 모든 지상파 뉴스는 동일한 원고를 읽었을 것이고, 밤사이 국회가 “질서 유지를 위한 군의 보호 아래 일시 정지됐다”는 설명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종이신문 1면에는 계엄사 로고와 함께 “국가 위기 수습을 위한 비상조치”라는 제목이 실리고, 사설은 “극단적 탄핵 정치의 폐해”와 “질서 회복의 필요성”을 동시에 언급했을지 모른다. 포털과 SNS의 댓글창은 ‘일시 점검’ 공지 아래 닫혀 있고, 광화문과 여의도에는 장갑차와 병력이 주둔한 채 야간 통행 제한이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첫 일주일은 “질서 회복”과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을 것이다. 국회는 계엄 포고령에 따라 사실상 기능을 정지당하고, 대통령실과 계엄사령부는 기존 국회 역할 일부를 대신할 긴급입법기구나 비상정책회의체를 설치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계엄사 보도검열 조직은 야당과 시민단체의 성명을 차단하고, 반대 집회 장면은 뉴스에서 빠졌을 것이다. 거리에 나온 시민들은 “불법집회 해산”을 이유로 강제 연행되거나, 계엄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을 수 있다.

3개월 단위로 시간을 늘려 보면, 정치·경제·외교 비용은 눈에 띄게 쌓였을 것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민주주의 국가의 리스크를 반영해 주식과 채권을 급히 처분하고, 신용평가사들은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 전망을 ‘하향 검토’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크다. 달러·원 환율과 국채 금리가 출렁이는 가운데, 정부는 “시장 교란 세력 단속”을 말하면서 자본 통제나 공매도 규제 강화로 대응을 시도했을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은 동맹을 존중한다는 표현과 함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우려”를 공식 문서에 남겨, 방산·정보 공유 협력에 보이지 않는 제약을 걸었을 것이다.

3년쯤 지나면, 계엄 체제 내부의 균열도 눈에 띄게 커졌을 가능성이 크다. 경제 성장률이 둔화되고 청년 실업과 자영업자의 불만이 쌓이는 가운데, 계엄을 정당화해 온 논리의 설득력은 점점 약해졌을 것이다. 군과 검찰, 경찰, 관료 집단 내부에서는 “이대로는 더 버티기 어렵다”는 회의와 피로가 축적되고, 일부 세력은 “질서 있는 퇴진과 사면”이라는 출구 전략을 모색했을지 모른다. 동시에 시민사회와 야당 잔존 세력은 조직된 대규모 총파업과 불복종 운동, 온라인과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한 국제 여론전을 통해 정권을 압박했을 것이다.

10년이라는 더 먼 시야에서는, 비상체제가 오래 유지됐을수록 그 후유증도 깊어졌을 것이다. 언론사와 방송사의 경영·편집 구조는 권력에 맞춰 재편되고, 사법부와 검찰의 인사 구조도 계엄기에 맞춘 충성 경쟁을 거쳐 굳어졌을 수 있다. 대학과 교육 현장에서는 정치적 자기검열이 강화되고, 인권·시민교육·비판적 역사 교육은 뒷전으로 밀렸을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제도와 엘리트 집단이 한 세대 동안 다른 방향으로 길들여지는 과정은, 이후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다시 되돌리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어느 순간에는 다시 큰 균열이 터져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경제 위기와 외교 고립, 내부 권력 투쟁과 시민 저항이 맞물리는 순간, 계엄 체제는 1980년대 군부정권처럼 퇴진 협상이나 파국적 충돌을 통해 막을 내렸을 것이다. 그때 한국 사회는 다시 한 번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 회복과 제도 개편을 둘러싼 소모적인 싸움을 수년간 반복해야 했을지 모른다. 12.3 사태는 그때 가서야 “또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이 타임라인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국회는 몇 시간 안에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시민들은 국회와 거리에서 헌정 질서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위헌적 계엄 선포를 파면 결정으로 정리했고, 해외 언론과 민주주의 관련 지표들은 한국을 “위기를 겪었으나 스스로를 교정한 민주주의”로 다시 기록하기 시작했다. 실패한 계엄 시도와 오지 않은 독재의 10년을 상상해 보는 이유는, 지금의 제도와 시민 의식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 위에 서 있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계엄이 성공했다면 그 끝에는 더 큰 붕괴와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며, 우리는 훨씬 더 힘든 길을 돌아 민주주의로 복귀해야 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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