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탄소규제의 현실 ② 기후위기를 이용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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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는 분명한 현실이지만, 탄소규제는 그 현실 위에 선진국과 강대국이 설계한 정치·경제의 규칙이다.

이 글은 기후위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탄소세·배출권·탄소국경조정제도·기후금융·손실과 피해 논의가 어떻게 결합되어 새로운 힘의 질서를 만들고 있는지 살핀다. 표면의 “환경”이라는 명분 뒤에서 실제로 누가 규칙을 짜고, 누가 비용을 내고, 누가 새로운 이익을 얻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최종 업데이트 2025-12-04

1. 기후위기와 탄소규제는 다르다

기후위기는 물리학의 문제이고, 탄소규제는 그 위에 얹힌 세금·무역·금융·산업정책의 문제다.

오늘날 기후위기의 실체를 통째로 부정하기는 점점 더 어렵다. 지구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보다 크게 올랐고, 극단적인 폭염·홍수·가뭄과 산불이 동시에 여러 대륙에서 관측되고 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인류 문명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하며, 빙하와 해수면 변화 또한 장기 관측 자료로 뒷받침된다. 기후과학자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인간 활동이 현재의 기후변화를 지배하고 있고, 추가 배출이 누적될수록 위험한 방향으로 밀려간다”는 결론은 더 이상 새로운 주장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그러나 “문제가 진짜”라는 말이 곧바로 “해법도 모두 옳다”는 뜻은 아니다. 탄소세와 배출권 거래제, 탄소국경조정, 재생에너지 의무 비율, 전기차 전환 목표는 기후위기 위에서 설계된 제도이지만, 설계 과정 자체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이다. 어느 연도를 기준으로 삼을지, 어떤 산업을 우선 줄일지, 누가 얼마를 부담할지, 언제까지 얼마를 지원할지 같은 질문은 과학보다 이해관계와 협상력이 더 크게 작용한다. 기후위기를 하나의 “현실”로 인정하는 것과, 그 위에서 만들어진 규칙을 그대로 신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 글은 그래서 기후위기의 물리적 실체를 전제로 두되, 탄소규제가 실제로 어떻게 설계되고 집행되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이익과 손해를 나눠 받는지에 집중한다. 1부인 탄소규제의 현실 ① 불완전한 전기차의 현재가 전기차라는 과도기 상품이 현장에서 만든 위험과 불안을 다뤘다면, 이번 글은 그 전환을 강요하는 규칙의 구조를 정면에서 들여다본다.

2. 역사적 배출과 “규칙 설계 권한”의 불일치

누가 더 많이 태웠는지와, 누가 규칙을 만드는지는 다르고, 이 간극이 탄소규제의 불신을 키운다.

2-1. 누적 배출량과 “기후 부채” 논쟁

탄소규제의 공정성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누적 배출량이다.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쌓인 이산화탄소를 합산해 보면, 미국과 유럽이 여전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에 러시아와 일본을 더하면 이른바 선진국 그룹이 역사적 책임의 상당 부분을 떠안는 그림이 된다. 최근 들어 중국과 인도가 연간 배출량에서 크게 치고 올라왔지만, “이제 막 성장 중인 나라”와 “이미 산업화를 끝낸 나라”를 같은 잣대로 보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하는 문제제기가 여기서 나온다.

기후위기 논쟁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후 부채”라는 개념은 바로 이 누적 배출량의 차이를 바탕으로 한다. 이미 화석연료를 마음껏 태워 성장한 나라들은 이익을 앞당겨 누렸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와 위험은 시간차를 두고 전 세계에 펼쳐진다. 반면 지금 막 산업화를 시도하는 나라들은 더 높은 비용과 더 많은 제약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 이때 탄소규제가 “같은 규칙을 모두에게 적용한다”는 이유만으로 공정해질 수 있는지, 혹은 더 큰 책임을 진 쪽의 추가 부담이 필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논쟁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2-2. 규칙을 만드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

역사적 배출과 별개로, 오늘날 탄소규제의 설계 권한은 주로 선진국과 국제기구에 집중되어 있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어떻게 설정할지, 배출권 거래제의 캡을 얼마나 빠르게 줄일지, 어떤 산업을 우선 대상에 올릴지 같은 결정은 유럽연합과 미국, 국제기구와 그 주변의 연구기관이 중심이 되어 논의를 이끈다. 각국이 자발적으로 국가별 감축목표를 제출한다고는 하지만, 그 목표를 평가하고 “충분하다·부족하다”를 판단하는 기준 역시 사실상 선진국이 주도하는 지식·정책 네트워크가 정한다.

이 구조는 규칙을 만드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 사이의 비대칭을 만들어 낸다. 선진국은 자국 산업과 금융 시스템을 고려해 규칙을 설계하고, 그 규칙을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확장한다. 중견 제조국과 개발도상국은 그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관세와 조달 제한, 금융·투자 리스크에 직면하게 된다. “규칙을 만들 권한은 위에, 규칙을 따라야 할 의무는 아래에 있다”는 인식이 확산될수록, 탄소규제는 환경정책이라기보다 힘의 정치로 느껴지기 쉽다.

3. 탄소국경조정과 녹색 보호무역의 실제 얼굴

탄소국경조정은 명목상 탄소 누출 방지지만, 실제로는 산업 보호와 공급망 재편이라는 얼굴을 함께 가지고 있다.

3-1. CBAM의 원리와 명분

유럽연합이 도입한 탄소국경조정제도, 이른바 CBAM은 “탄소 누출”을 막기 위한 제도라는 명분으로 소개된다. 유럽 내부에서 탄소 가격을 높게 책정하고 배출권을 줄이면, 기업들이 규제가 느슨한 나라로 생산을 옮겨 버릴 위험이 있다. 이 경우 지구 전체 배출량은 줄지 않고, 일자리와 세수만 빠져나간다. 이를 막기 위해, 유럽은 역내에서 생산된 제품뿐 아니라 수입되는 제품에도 비슷한 수준의 탄소 비용을 부과하겠다고 선언했다. 겉으로 보면 규칙은 단순하다. “유럽 안에서 팔리는 물건은, 어디에서 만들었든 유사한 탄소가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CBAM이 적용되는 품목을 보면 유럽의 의도를 조금 더 읽을 수 있다. 시멘트와 철강, 알루미늄, 비료, 전력, 수소와 같은 품목들은 모두 유럽의 전통 제조업과 직결된 산업이다. 탄소 규제가 느슨한 나라에서 값싼 철강과 비료가 밀려 들어오면, 유럽 기업들은 역내 탄소가격 때문에 가격 경쟁력을 잃기 쉽다. CBAM은 이런 상황을 “환경을 위한 공정 경쟁”이라는 언어로 포장하면서도, 사실상 유럽 산업을 보호하는 관세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탄소라는 새로운 기준을 통해,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재정의하는 작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3-2. 수출국과 개발도상국이 느끼는 압박

수출국의 입장에서 CBAM은 단순한 환경 규제가 아니다. 유럽으로 철강과 알루미늄, 시멘트와 비료를 수출하는 기업은 제품 생산 전 과정의 탄소배출을 계산해 보고해야 하고, 유럽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검증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측정과 보고, 검증에 필요한 인력과 시스템 비용이 새로 발생한다. 무엇보다, 자국 내 탄소 가격이 유럽보다 낮다면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한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이것은 곧 수출 단가와 수익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개발도상국과 중소 수출기업에게 이러한 변화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아직 제대로 된 배출 데이터 시스템도 갖추지 못한 기업에게는, 갑자기 복잡한 문서와 계산을 요구하는 행정 장벽이 된다. 값싸고 탄소 규제가 느슨하다는 이유로 경쟁력을 가져왔던 기업들은, 새로운 기준 아래에서 “환경에 나쁜 제품”이라는 낙인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탄소누출 방지라는 명분이 실제로는 “우리 기준을 맞추지 않는 제품은 시장에서 밀어내겠다”는 신호로 읽히는 이유다.

3-3. 녹색 보호무역이라는 비판

이 때문에 CBAM을 둘러싸고 “녹색 보호무역”이라는 비판이 따라붙는다. 관세와 쿼터, 기술 규제 대신 탄소라는 잣대를 활용해 시장 진입을 조절한다는 의미다. 유럽이 탄소 가격과 규제 강도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CBAM은 탄소 기준을 명분으로 가져온 새로운 무역 정책 도구라고도 볼 수 있다. 환경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작동 방식은 전통적인 보호무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녹색 보호무역의 문제는 단순히 “불공정하다”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탄소규제에 대한 불신을 키워, 기후위기 대응 전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조차 “환경을 빌미로 새로운 관세를 올리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품게 되면, 규칙은 정당성을 잃는다. 탄소규제가 진짜 목표를 달성하려면, 규칙의 설계와 집행이 산업 보호와 지정학적 계산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에 대한 설명이 훨씬 더 투명해야 한다.

4. 기후금융과 손실·피해, 약속과 현실 사이

“누가 돈을 얼마나 내고, 누구를 얼마나 도울 것인가”에서 기후정의 논쟁의 실체가 드러난다.

4-1. 연간 1천억 달러 약속의 의미와 한계

선진국은 2009년부터 개발도상국을 위해 매년 1천억 달러의 기후재원을 조성하겠다고 약속해 왔다. 표면적으로 이 약속은 “우리가 더 많이 태웠으니, 감축과 적응을 위해 재정 지원을 하겠다”는 반성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실제 이행 과정에서는 여러 번 약속이 지연되었고, 수치가 맞춰졌다고 발표된 이후에도 그 구성이 보조금과 대출, 민간 자금 유치분이 섞인 복합적인 구조라는 점이 논란이 되었다. 지원을 받는 쪽에서는 “우리가 부담하는 전환 비용과 손실·피해에 비해, 실제로 들어오는 돈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누적되어 있다.

기후금융 논쟁의 핵심은 “얼마”보다 “어떤 형태로”라는 질문에 있다. 이자와 상환 의무가 있는 대출은 결국 부담이 되어 돌아오고, 민간 자금 유치분은 시장 논리에 따라 흘러간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담의 재분배”가 되려면, 무상 지원과 기술 이전, 취약국의 재정적 충격을 줄이는 장치가 충분히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기후금융은 아직 그 지점에 이르지 못했고, 선진국의 책임과 개발도상국의 요구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크다.

4-2. 손실과 피해, 그리고 새로운 기금의 정치

적응을 넘어서는 영역에서 제기되는 것이 “손실과 피해” 논의다. 이미 일어난 홍수와 태풍, 해수면 상승과 가뭄으로 집과 삶터를 잃은 사람들에게, “앞으로 줄이겠다”는 약속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서 손실과 피해 논의는 기후위기의 책임과 보상을 둘러싼 새로운 정치적 쟁점이 된다. 어떤 기준으로 피해를 산정할지, 누가 얼마나 부담할지, 어떤 방식으로 보상과 지원을 제공할지에 대한 합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최근 설립이 논의된 손실·피해 기금은 상징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지만, 실제 기금 규모와 운영 방식, 주요국의 참여 의지에는 여전히 많은 물음표가 붙어 있다. 일부 선진국은 법적 책임 인정으로 이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기여를 “선의의 지원”으로 한정하려 하고, 피해국들은 “만성적인 부족과 지연”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다. 이렇게 보면 손실·피해 기금은 기후정의의 성취라기보다, 갈등을 잠시 눌러 두기 위한 임시 해법에 가깝다.

4-3. 기후정의와 신뢰의 문제

기후금융과 손실·피해 논의에서 반복되는 것은 신뢰의 문제다. 감축 목표와 탄소규제는 점점 더 정교해지는데, 그에 상응하는 재정 지원과 기술 이전은 항상 한 박자씩 늦게 따라온다. 지원 약속이 실제로 얼마나 이행되었는지, 숫자에 어떤 항목이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한 통계 싸움이 이어지면서, 취약국과 시민사회는 “기후위기 대응이 정말로 모두를 위한 연대인지, 아니면 선진국의 또 다른 관리 도구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이 신뢰의 붕괴는 곧 탄소규제 전체의 정당성을 위협한다. 규칙을 지키는 쪽이 계속해서 손해를 보고, 규칙을 설계한 쪽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규칙은 더 이상 도덕적 힘을 잃는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분명 더 강한 규제와 빠른 전환이지만, 그 규제가 누구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피해 갈 수는 없다.

5. 탄소시장의 금융화와 “탄소 자산”의 등장

탄소는 오염물질이자 동시에 금융상품이 되었고, 이중적인 얼굴이 규칙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다.

5-1. 배출권 거래제와 가격 신호의 논리

탄소규제의 대표적인 도구인 배출권 거래제는, 전체 배출량에 상한을 정한 뒤 그 안에서 배출권을 사고팔게 하는 방식이다. 이론상으로는 총량을 강하게 제한하고, 배출권 가격을 충분히 높게 유지하면 기업들은 배출을 줄이는 것이 이익이 된다. 초기에는 배출권을 넉넉히 나눠 주되, 시간이 지나면서 상한을 줄여 가는 구조가 많다. 가격 신호를 통해 가장 비용 효율적인 감축이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실제 배출권 시장은 이론만큼 단순하지 않다. 초기 설계에서 배출권을 과도하게 많이 나눠 주면 가격이 충분히 오르지 않고, 기업은 굳이 설비를 교체하거나 공정을 바꿀 유인을 느끼지 못한다. 반대로 너무 빠르게 상한을 줄이면, 특정 산업과 지역에 급격한 비용 충격이 발생할 수 있다. 무엇보다 배출권 가격이 기업의 투자 판단뿐 아니라 금융 투자자의 수익 기회로도 여겨지면서, 탄소시장은 점점 더 금융시장과 닮은 모습을 띠고 있다.

5-2. 상쇄·크레딧과 진짜 감축의 문제

배출권 거래제와 함께 등장한 것이 탄소 상쇄와 각종 크레딧이다. 나무를 심거나, 재생에너지 설비를 짓거나, 토지를 보전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감축 효과”를 수치화하고, 이를 크레딧으로 만들어 다른 곳의 배출을 상쇄해 주는 구조다. 기업은 직접 배출을 줄이는 대신 크레딧을 사서 목표를 맞출 수 있고, 프로젝트 개발자는 그 대가로 자금을 받는다. 이론상으로는 지구 전체 배출량이 줄어든다면 어느 쪽에서 줄어들든 상관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상쇄와 크레딧 시장에서는 “진짜 감축”이 맞는지, 동일한 감축 효과를 중복 계산한 것은 아닌지, 감축 효과가 얼마나 오래 유지될지에 대한 회의가 끊임없이 제기된다. 이미 벌어진 산불과 개발로 인해 과거에 발급된 크레딧의 감축 효과가 사라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논란 속에서 탄소 상쇄는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또 다른 금융상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규칙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종이를 사고팔 뿐, 실제로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그래서 나온다.

6. 한국이 서 있는 자리와 “전방에서 맞는 규제”

한국은 역사적 책임에 비해, 현재의 규제 부담과 산업 전환 비용을 전방에서 맞는 위치에 서 있다.

6-1. 제조·수출 구조와 탄소규제의 직격탄

한국 경제는 오랫동안 제조업과 수출에 의존해 왔다. 철강과 석유화학, 자동차와 조선, 전자와 배터리가 국내총생산과 일자리를 떠받치는 축이다. 이런 구조에서 탄소규제와 탄소국경조정은 단순한 환경 규제가 아니라, 곧바로 산업 경쟁력과 통상 조건을 바꾸는 변수다. 특히 유럽과 미국, 일본, 중국이 각자 다른 방식의 탄소규제와 공급망 정책을 쏟아내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은 여러 규칙을 동시에 맞춰야 하는 이중·삼중 부담에 직면한다.

전환 비용은 공장과 설비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구개발과 금융, 인력 구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리고 공정을 바꾸는 데에는 막대한 초기 투자와 시간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비용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은 시장에서 밀려나거나, 공급망에서 배제될 위험이 있다. 결과적으로 탄소규제는 “환경을 위한 규칙”이면서 동시에 “누가 다음 세대의 공급망에 남을 것인가”를 가르는 필터 역할을 한다.

6-2. 기업과 협력사의 서로 다른 속도

대기업과 일부 글로벌 중견기업은 탄소규제 대응을 위해 전담 조직을 만들고, ESG 보고와 탄소배출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들은 국제 투자자와 고객의 요구를 잘 알고 있고, 규칙 변화를 비교적 빠르게 읽어 낼 수 있는 인력과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수많은 중소 협력사와 내수 중심 기업은 같은 속도로 대응하기 어렵다. 대기업이 공급망 전반의 탄소 정보를 요구하면, 중소기업은 갑자기 회계와 공정 데이터를 새로 정리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 설비 개선과 공정 변경까지 요청받는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부담은 공급망 안에서 다시 나눠진다. 일부는 대기업이 흡수하지만, 상당 부분은 납품단가와 인력 구조조정, 투자 축소의 형태로 내려간다. 탄소감축 자체가 필요하다고 해도, 그 비용이 누구에게 얼마나 돌아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규칙을 읽고 설계에 참여하는 쪽과, 나중에 통보받고 따라야 하는 쪽의 격차는 이렇게 벌어진다. 탄소규제는 산업 구조의 기존 격차를 줄이기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간극을 만들어 낼 가능성도 함께 안고 있다.

6-3. 개인과 생활에 전가되는 전환의 비용

탄소규제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개인과 생활이다. 전력과 난방, 교통과 식품, 건설과 제품 가격에는 전환 비용이 조금씩 녹아 들어간다. 에너지 가격이 오르면 전기요금과 난방비를 통해 체감되며, 산업 전환에 필요한 재정 지출은 세금과 공공요금, 금융 비용의 변화로 돌아온다. 재생에너지 투자와 전력망 보강, 노후 설비 교체와 친환경 인프라 구축은 모두 필요한 일이지만, 그 비용을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체감은 “미래를 위한 투자”와 “또 다른 부담” 사이를 오간다.

1부에서 다룬 전기차 사례는 이러한 구조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 아직 기술과 인프라, 안전 기준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전기차가 “탄소중립 수송의 답”이라는 이름으로 보급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수송 부문 감축 목표와 각국의 차량 규제가 자리한다. 즉, 위에서 탄소게임의 방향이 정해진 뒤에, 불완전한 전환 수단이 개인의 구매 선택지로 내려오는 구조다. 전기차를 둘러싼 안전과 감가, 인프라 불균형 논쟁은 곧 탄소규제의 생활화가 어떤 얼굴로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7. 기후위를 인정하면서, 탄소게임은 의심하는 법

환경이라는 명분과 별개로, “누가 규칙을 짰고, 누가 비용을 내고, 누가 이익을 보는가”를 묻는 것이 탄소규제를 대하는 가장 현실적인 태도다.

기후위기를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단순한 이분법이다. 기후위기의 실체를 인정하면 모든 탄소규제를 지지해야 하고, 탄소규제를 비판하면 곧바로 ‘퇴행’이나 ‘부정론’으로 취급되는 공기다. 실제로는 기후위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일수록, 그 해결책이 정말 효과적인지, 부담이 공정하게 나뉘어 있는지, 새로운 불평등을 낳고 있지는 않은지 더 엄밀하게 따질 필요가 있다. 문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특정 해법 패키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탄소규제를 바라볼 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 규칙은 역사적 책임과 현재의 부담을 어떻게 나누고 있는가. 둘째, 이 규칙이 시행되면 어떤 나라와 산업, 어떤 계층이 유리해지고, 어떤 쪽이 추가적인 비용과 제약을 떠안는가. 셋째, 전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나라와 계층에게 약속된 지원과 보상은 제때, 충분한 규모로 이뤄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모순과 공백으로 가득할수록, 그 탄소규제는 기후위기를 이용한 권력의 도구에 가까워진다.

민주사회에서 시민이 선택할 수 있는 태도는, 기후위기를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탄소게임의 설계와 집행을 계속해서 질문하는 일이다. 전환 속도를 늦추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속도를 누가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 어떤 이들은 아예 탈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아닌지 묻자는 것이다. 기후위기의 피해가 가장 큰 이들에게 목소리와 자원을 돌려주고, 규칙을 짜는 자리에 더 많은 당사자가 참여할수록, 탄소규제는 “환경을 앞세운 새로운 사다리 치기”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덜 불공평한 규칙에 가까워질 수 있다.

1부에서 다룬 전기차의 과도기적 불완전성은,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불완전한 상품이 미래의 표준이라는 이름으로 보급될 때, 그 뒤에는 언제나 특정한 규칙과 목표가 깔려 있다. 탄소규제의 현실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기술 전환의 불완전함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안전하고 공정한 전환을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이다.

참고·출처

국제 기후과학 보고서와 탄소규제·기후금융·탄소시장 관련 정책·분석 자료를 종합해, 구조적 흐름 위주로 관점을 정리했다.

기후위기의 과학적 근거와 온도 상승 경향, 1.5도·2도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IPCC 6차 평가보고서와 1.5도 특별보고서, 이들을 해설한 국제 연구기관과 정책 분석 보고서를 참고했다. 누적 온실가스 배출과 국가별 역사적 책임, 최근 연간 배출량 추이는 글로벌 탄소 예산 자료와 국제 통계 플랫폼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배출권 거래제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구조와 적용 품목, 단계별 시행 일정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관련 부처가 공개한 공식 설명 자료, 탄소가격제와 배출권 시장을 다룬 국제기구·연구기관의 분석을 참고했다. 기후금융과 연간 1천억 달러 목표, 기후재원 이행 상황은 OECD와 UN 기후변화협약(UNFCCC), 주요 싱크탱크와 학자들의 평가 보고서를 기준으로 삼았다.

손실·피해(LOSS & DAMAGE) 논의와 관련 기금의 설립·운영 경과, 기후정의와 기후부채 개념은 UNFCCC 회의 문서와 국제 환경단체·연구기관의 해설 자료를 함께 참고했다. 한국의 위치와 부담에 대해서는 국내 산업 구조와 수출 비중, 에너지 전환·탄소중립 관련 정부 로드맵, 주요 연구기관과 금융사가 발표한 탄소규제 대응·공급망 리스크 분석 보고서를 종합해, 개별 사례보다 구조적 특성이 드러나도록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