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의 섬, 문명의 거울 — 바다를 표류 하는 소설의 탄생과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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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전, 남태평양과 대서양을 배경으로 한 표류기 소설의 세계는 단순한 ‘모험 이야기’ 그 이상이다. 이 장르의 뿌리는 깊고 넓다. 사람들은 흔히 『로빈슨 크루소』(1719)를 ‘표류 서사’의 출발점으로 여기지만, 사실 표류는 이미 유럽 문학 곳곳에서 독립적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로빈슨아드(Robinsonade)’라는 명칭은 다니엘 디포의 소설에서 시작됐지만, 그 토양에는 여러 나라와 언어, 실제 표류 경험과 수많은 사회적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표류 서사는 주인공이 문명과 갑작스럽게 분리되어 무인도나 고립된 섬에 내던져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가진 것은 극히 제한적이고, 모든 것을 맨손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생존, 자립, 극한의 고독,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 『로빈슨 크루소』는 이런 이야기를 최초로 정교하게 펼쳐 보였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독일의 그림멜스하우젠은 『심플리치시무스』(1668)에서, 전쟁에 내던져진 주인공이 남대서양의 섬에서 살아가는 모티프를 남겼고, 18세기 유럽에서는 디포의 성공을 흉내 내거나 변주한 수많은 모험담들이 출간되었다.

이 장르는 계몽주의의 합리적 개인주의, 그리고 식민지 개척이라는 시대의 욕망을 동시에 반영한다. 고립된 섬은 ‘백지’다. 이곳에서 유럽인 주인공은 본국의 질서와 경제 원칙, 문명의 우월함을 증명한다. 그러니 로빈슨아드는 늘 ‘문명은 야만보다 우월하다’는, 당시 제국주의적 신념의 문학적 실험장이기도 했다. 물론 모든 작품이 이런 단순한 이분법에 머문 것은 아니다. 표류기는 대개 두 층의 긴장을 지녔다. 하나는 극한의 생존이라는 개인의 고뇌, 또 하나는 유럽 중심적 시각에 대한 내적 갈등과 성찰이다. 실제로 어떤 표류기는 식민주의를 적극 옹호하는 듯 보이지만, 어떤 표류기는 비판과 반성, 심지어 대안적 사회구조를 상상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로빈슨아드 장르는 현실에 있었던 표류 체험, 특히 선원들의 생존담에서 직접 영감을 받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셀커크다. 그는 1704년 칠레 인근의 후안 페르난데스 제도에 혼자 남겨져 4년 4개월을 견뎠다. 그의 이야기는 곧 영국 전역에 퍼졌고, 디포가 『로빈슨 크루소』를 집필할 때 큰 자극제가 되었다. 하지만 문학 연구자들은 셀커크 외에도 동시대 유럽에 다양한 표류자들이 존재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16세기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드 라 로크는 퀘벡 인근의 섬에서 생존했고, 18세기 네덜란드의 하센보스는 동성애를 이유로 남대서양 어센션 섬에 버려져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스페인 선원 세라노 역시 카리브해의 작은 섬에서 7~8년을 살아냈다.

이처럼 실제 표류 사례들은 때때로 ‘처벌’과 ‘사회적 배척’의 서사와도 연결된다. 셀커크처럼 자발적으로 남은 사람도 있었지만, 하센보스나 드 라 로크처럼 사회 규범을 어겼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섬에 버려진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때로는 사회적 정의의 대상으로, 때로는 ‘새로운 시작’의 주체로 그려졌다. 그래서 표류 서사는 생존과 자립의 영웅담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질문과 반성의 장이기도 하다.

대서양을 무대로 한 표류기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작품은 단연 『로빈슨 크루소』다. 이 소설에서 크루소는 대서양의 무인도에서 28년을 살아간다. 현실적인 생존기이자,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긋는 상징적인 이야기다. 그는 자신이 만난 원주민에게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주며, 그를 점차 ‘문명화’시킨다. 이 소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로빈슨아드’라는 장르적 토대와 대중성을 동시에 쌓아 올렸다. 대서양 표류기에는 그림멜스하우젠의 『심플리치시무스』, 르 사주의 『M. 드 보셴의 생애와 모험』, 아베 프레보의 『로버트 레이드 선장의 항해』, 그리고 특이하게도 혼혈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익명의 『미국 여성』(1767) 같은 작품이 있다. 이 ‘미국 여성’은 단순한 생존담을 넘어, 혼혈 정체성, 원주민과의 관계, 종교 개종, 심지어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라는 진보적 이상까지 그려내며, 장르의 경계를 넓혔다.

남태평양을 배경으로 한 표류기는 또 다른 풍경을 펼친다. 피터 롱그빌의 『영국 은둔자』(1727)는 남해의 외딴 섬에 고립된 주인공이 영국 문명을 거부하고 자발적 고립을 택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 작품은 단순한 모방작이 아니라, 고독과 사회비판, 철학적 선택의 드라마를 품고 있다. 로버트 팔톡의 『피터 윌킨스의 생애와 모험』(1751)은 남극 인근에서 비행 종족과의 만남, 노예제 반대, 여성의 주체성을 테마로 내세운다. 이처럼 환상과 현실, 사회비판이 뒤섞이며, 18세기 모험소설과 초기 공상과학이 교차하는 지점이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표류기들이 소설을 넘어 연극(코체부의 『라 페루즈, 2막 드라마』) 등 다양한 예술 형태로도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라 페루즈 원정대 실종이라는 실제 사건을 각색해 원주민 여성과의 삶, 가족의 재회, 멜로드라마적 감정의 얽힘까지 무대에 올리며 표류 서사의 폭을 확장했다.

이 장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제는 식민주의와 정체성,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다. 표류기는 유럽인의 문명 우월 의식을 강화하는 동시에, 때로는 그 이데올로기적 틀을 흔들고 사회구조, 성 역할, 인종, 경제 질서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예컨대 『미국 여성』은 여성, 그것도 혼혈 여성의 주체적 생존과 원주민 개종, 유토피아적 사회 실험을 통해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시도를 보여주었고, 『피터 윌킨스』 역시 여성과 노예제 문제에 대한 비판을 소설에 담았다.

결국 19세기 이전의 표류기는 표면적으로는 ‘생존’의 모험담이지만, 이면에는 식민주의의 거울, 계몽주의적 개인주의, 사회 질서와 성 역할에 대한 실험장이 있었다. 장르는 실제 해상 탐험과 대중의 생존 서사에 대한 갈증, 그리고 현실의 사회적 이슈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들은 특정 국적이나 언어를 초월해, 대서양 횡단적이고 남태평양을 아우르는 ‘초국적 텍스트’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이후에도 표류 서사는 『스위스 가족 로빈슨』(1812), 쥘 베른, 심지어 현대의 『마션』(앤디 위어)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끊임없는 생존, 자립, 그리고 극한의 고독 속에서 새로운 사회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이야기. 표류 서사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본성과 사회, 문명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는 문학적 실험장이었고, 지금도 그 매력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고전 표류기(19세기 이전)

심플리치시무스 – 한스 야코프 크리스토펠 폰 그림멜스하우젠, 1668년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 – 다니엘 디포, 1719년

영국 은둔자(The English Hermit: or, The Adventures of Philip Quarll) – 피터 롱그빌, 1727년

M. 드 보셴의 생애와 모험(Vie et avantures de M. de Beauchesne) – 알랭-르네 르 사주, 1733년

로버트 레이드 선장의 항해(Histoire de la vie et des aventures de Robert Lade) – 아베 프레보, 1744년

존 다니엘의 생애와 놀라운 모험(The Life and Astonishing Adventures of John Daniel) – 랄프 모리스, 1751년

피터 윌킨스의 생애와 모험(The Life and Adventures of Peter Wilkins) – 로버트 팔톡, 1751년

미국 여성(The Female American) – 익명(페넬로페 오브라이언 추정), 1767년

라 페루즈, 2막 드라마(La Pérouse: Ein Drama in zwei Aufzügen) –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 17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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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후(대표적 소년·가족 표류 소설 및 주요 변주)

스위스 가족 로빈슨(The Swiss Family Robinson) – 요한 다비드 비스, 1812년

세 소년 표류기(The Three Boys; The Three Shipwrecked Boys) – W. H. G. Kingston, 1878년

보물섬(Treasure Island)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1883년

15소년 표류기(Deux Ans de Vacances, Two Years' Vacation) – 쥘 베른, 1888년

파랑새(The Blue Bird) – 모리스 마테를링크, 1908년(직접 표류기는 아니지만, 고립과 자립 모티프를 계승)

코럴 아일랜드(The Coral Island) – R. M. Ballantyne, 1858년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 – 윌리엄 골딩, 1954년(소년 표류 서사의 현대적 재해석)


 

 

고립의 섬, 문명의 거울 — 바다를 표류 하는 소설의 탄생과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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