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어 사과는 국민을 ‘해석자’로 만든다
공적 사과의 목적은 감정 표현이 아니라 신뢰 회복이다. 그런데 ‘심심한 사과’ 같은 이중 의미 표현은 책임의 문장을 흐린다. 뜻을 안다고 해도, 거리두기 톤은 그대로 남는다.
사과는 문학이 아니라 행정 언어다
공적 사과는 감정의 고백이 아니다. 잘못의 범위와 책임의 주체를 확정하는 말이다. 그래서 사과문은 짧아도 된다. 대신 오해가 끼어들 틈이 없어야 한다. 표현이 애매해지는 순간, 사과는 곧바로 변명이 된다.
국민 앞 발표는 특히 그렇다. 청중은 글을 되감아 읽지 않는다. 한 번 들리고 끝나는 말에서, 단어의 다의성은 독이 된다. ‘뜻은 원래 깊다’는 해명은, 애초에 설계 실패를 고백하는 말이다.
공적 사과는 단의적이어야만 성립한다.
왜 ‘말이 멀어지는 사과’가 반복되는가
조직의 말은 개인의 말과 다르다. 문장은 여러 번 검토되고, 무난한 문구가 살아남는다. 이 과정에서 감정은 지워지고, 상투어는 남는다. 문제는 상투어가 편할수록, 책임이 흐려진다는 점이다. “사과는 했음”만 남고, “무엇을 바꿈”은 사라진다.
여기엔 방어 심리도 섞인다. 정확한 인정은 곧바로 책임을 확장시킨다. 그래서 문장은 ‘대충 맞는 말’로 도망간다. 그 대충의 자리에 한자어와 관용구가 앉는다. 듣는 쪽은 진심이 아니라 계산을 감지한다.
검수 친화적 문구는 책임 친화적이지 않다.
동음이의어는 ‘변명 가능한 사과’의 방패가 된다
‘심심(深深)’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논란이 반복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뜻이 아니라 태도가 읽히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언제든 “원래 그런 뜻”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이 곧 불신을 만든다.
사과는 상대가 받아야 끝난다. 그런데 해석을 요구하는 사과는, 상대에게 노동을 시킨다. “깊다”를 아는 사람도 기분이 나빠진다. 왜냐하면 그 깊이는 책임의 깊이가 아니라 수사의 깊이로 들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사과는 말장난처럼 소비된다.
빠져나갈 여지가 보이면, 진정성은 즉시 붕괴한다.
제대로 된 사과는 3문장으로 충분하다
첫째,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한 문장으로 특정한다. 둘째, 누가 책임지는지 주어를 숨기지 않는다. 셋째, 무엇을 언제까지 바꾸는지 기한을 건다. 이 세 문장이 있으면 수사는 필요 없다. 이 세 문장이 없으면 어떤 미사여구도 무의미하다.
여기서 ‘유감’과 ‘오해’는 경계해야 한다. 피해를 흐리고 책임을 분산시키기 쉽다. “살피겠다, 검토하겠다”도 마찬가지다. 비용이 없는 약속은 대개 다음 날 잊힌다. 사과의 실체는 문장이 아니라 실행의 비용이다.
사과의 완성 조건은 주어, 특정, 기한이다.
국민이 매몰차게 평가해야 바뀐다
말이 미끄러우면 행동을 더 보게 된다. 그런데 사회가 “사과했잖아”로 넘어가면, 조직은 학습한다. 다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넘길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평가 기준을 단어에 두면 안 된다. 책임 인정의 구체성과 조치의 실비용으로 판단해야 한다.
사과문 논란이 반복될수록 결론은 단순해진다. ‘표현의 실수’가 아니라 ‘책임의 습관’이다. 그 습관은 비판이 약하면 고쳐지지 않는다. 모호한 사과에 면죄부를 주는 순간, 모호함은 제도가 된다. 매몰찬 비판은 감정이 아니라, 규칙을 세우는 행위다.
비판은 감정이 아니라 재발 방지 장치다.
참고·출처
‘심심하다’가 ‘지루하다’ 외에도 ‘깊고 간절하다’의 의미로 쓰인다는 점은 표준국어대사전 등 국어사전의 다의어 설명과 문어체 용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적 사과의 효과가 수사보다 책임 인정, 구체적 조치, 재발 방지의 실행 가능성에 의해 좌우된다는 논지는 위기 커뮤니케이션과 공공 커뮤니케이션 관련 연구와 실무 지침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진다.
사전적 정당성보다, 공적 언어의 책임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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