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이 바꾼 세계사 ⑤ 우운디드 니 점거 이후 인디언 권리 운동, 20세기 인권·정치사의 축
우운디드 니 점거는 1890년 학살의 기억 위에서, 인디언이 미국 연방 정부와 정면으로 맞붙어 조약 준수와 자기결정을 요구한 20세기 전환점이었다. 이 글은 그 점거 이후 인디언 권리 운동과 미국 인권·정치 지형이 어떻게 재편됐는지, 레드 파워와 법·정책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핀다.
최종 업데이트 2025-11-18
읽기 경로·예상 소요 1960년대 도시 인디언과 레드 파워 → 1973년 우운디드 니 점거의 경과 → 연방 정부와의 대치와 이후 탄압 → 인디언 권리 법제의 변화 → 20세기 인권·정치사 속 의미 순으로 읽으면 약 14~18분이 걸린다.
인디언이 바꾼 세계사 시리즈 한 번에 보기
① 체로키의 눈물의 길, 1838년 강제 이주 · ② 나바호 코드 토커, 태평양 전쟁을 바꾼 언어 · ③ 버팔로가 사라진 날, 대평원의 질서가 무너진 이유 · ④ 스탠딩 록과 석유 파이프라인, 21세기 인디언의 토지·환경 투쟁 · ⑤ 우운디드 니 점거 이후 인디언 권리 운동, 20세기 인권·정치사의 축
외전 〈인디언 보호구역,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 보러 가기: 인디언 보호구역,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
외전 〈인디언과의 조약은 어떻게 체결되고 깨졌나〉시리즈 보러 가기: 영토의 주인 : '우리'라는 이름의 함정 - 하나의 땅, 갈라진 목소리들
도시 인디언과 레드 파워, 우운디드 니를 향한 긴 예고편
우운디드 니 점거를 이해하려면, 먼저 1960년대 도시 인디언의 현실을 돌아봐야 한다. 전후 연방 정부는 원주민을 도시로 보내는 ‘재배치 정책’을 밀어붙였고, 많은 인디언이 미네아폴리스와 오클랜드, 로스앤젤레스 같은 도시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안정된 일자리나 주택이 아니라, 인종차별과 빈곤, 경찰 폭력이었다.
1968년 미네아폴리스에서 출범한 아메리칸 인디언 무브먼트(AIM)는 바로 이런 도시 인디언의 분노에서 태어났다. 설립 초기 AIM의 목표는 경찰의 과잉 단속을 감시하고, 실업과 교육, 주거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전 반전 운동과 흑인 민권·블랙파워 운동의 흐름과 만나면서, 인디언 운동의 방향은 점점 더 ‘레드 파워’라 불리는 급진 정치 운동으로 옮겨 갔다.
1969년 알카트라즈 섬 점거와 워싱턴 D.C.의 인디언 업무국(BIA) 본부 점거는 이런 변화의 상징적 장면이었다. 인디언 활동가들은 더 이상 조용히 청원을 올리는 소수 집단이 아니라, 미디어와 상징 공간을 활용해 “조약을 지키라, 이 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외치는 정치 행위자로 등장했다. 우운디드 니 점거는 이 일련의 점거·행진·캠프들 위에 쌓인 다음 장이었다.
우운디드 니 점거는 도시 인디언의 분노와 레드 파워 운동이 학살의 기억과 만난 지점에서 폭발한 사건이었다.
1973년 우운디드 니, 학살의 장소가 점거의 장소가 되다
1973년 2월 27일, 약 200명의 오글라 라코타와 AIM 활동가들이 사우스다코타 파인리지 보호구역의 작은 마을 우운디드 니를 점거했다. 이곳은 1890년 미군이 수백 명의 라코타 남녀노소를 학살한, 그 유명한 우운디드 니 학살의 현장이었다. 활동가들은 일부러 이 상징적인 장소를 선택해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점거의 직접적인 계기는 부족 정부 내의 부패와 폭력에 대한 불만이었다. 많은 주민들은 당시 부족 의장 리처드 윌슨이 연방 정부와 결탁해 반대파를 억압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운디드 니에서 AIM과 오글라 전통파가 내건 요구는 훨씬 더 장기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1868년 포트 라러미 조약을 포함한 오래된 조약들의 재검토와, 연방 정부의 약속 위반에 대한 조사, 그리고 부족 자치권 강화를 요구했다.
연방 정부는 즉각 대응했다. 연방 보안관과 FBI, 주 방위군이 마을을 포위했고, 중무장한 병력과 장갑차, 저격수가 우운디드 니를 둘러쌌다. 곧 이어진 71일간의 대치는 총격전과 협상, 물자 봉쇄와 언론 플레이가 뒤섞인 고강도 정치·군사 이벤트가 되었다. 전 세계 언론이 우운디드 니를 주목했고, TV 화면 속 인디언의 이미지는 서부 영화 속 조연이 아니라, 국가와 맞서는 시위대의 얼굴로 바뀌어 갔다.
우운디드 니 점거는 학살의 마을을 다시 점령함으로써, ‘과거의 피해자’ 이미지를 ‘현재의 정치 행위자’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71일 대치와 이후의 탄압, 레드 파워의 대가
우운디드 니 점거 기간 동안 최소 두 명의 인디언 활동가가 사망하고, 여러 사람이 부상당했다. 연방 정부 측에서도 부상자가 나왔다. 물자 공급이 끊긴 상태에서 여성과 아이, 노인이 함께 포위된 마을에 남아 있었고, 부족 장로와 종교 지도자들은 전통 의식을 이어가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다. 동시에 AIM 지도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조약 위반과 빈곤, 경찰 폭력을 고발했다.
5월 8일, 연방 정부가 부족 내 정치 상황과 조약 문제에 대한 조사를 약속하자, 점거는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그러나 약속의 상당 부분은 지켜지지 않았고, 이후 파인리지에서는 정부 친위 조직과 AIM 지지자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이 지역의 살인율은 미국 평균을 훨씬 웃돌았고, 수십 건의 의문사와 미해결 사건이 남았다.
연방 수사기관은 우운디드 니 이후 AIM을 급진 조직으로 규정하고, 지도부를 기소와 감시, 분열 공작의 대상으로 삼았다. 일부 재판에서는 증거 조작과 불법 도청이 문제로 지적되었고, 이에 대한 법원 판단이 나중에 인권·사법 개혁 논의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레드 파워 운동은 주목받는 만큼, 그 대가로 혹독한 국가적 압박을 감수해야 했다.
우운디드 니의 71일은 인디언 운동의 존재감을 폭발적으로 키웠지만, 동시에 오랜 기간의 탄압과 분열이라는 상처도 남겼다.
법과 제도의 변화, 인디언 권리가 조문으로 새겨지다
우운디드 니 점거와 레드 파워 운동이 없었다면, 1970년대 인디언 관련 법제 변화는 훨씬 더 느리고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이미 1968년 제정된 인디언 민권법은 부족 정부가 구성원에게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한 첫 시도였다. 하지만 이 법만으로는 연방 정부의 정책 방향을 바꾸기엔 부족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75년 인디언 자결·교육 지원법이었다. 이 법은 연방 정부가 일방적으로 프로그램을 집행하던 구조에서 벗어나, 부족이 스스로 교육·보건·자원 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자결 계약’을 맺을 수 있게 했다. 이후 인디언 종교 자유법과 인디언 아동 복지법 등이 잇달아 제정되면서, 종교 의례와 가족, 입양 문제에서도 인디언 공동체의 권리가 점차 인정되기 시작했다.
이들 법은 우운디드 니 점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의회 청문회와 공청회에서 인디언 활동가와 지도자들은 반복해서 우운디드 니를 소환했다. 학살의 기억과 1973년 점거의 경험은 “더 이상 인디언을 일방적으로 관리하지 말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인정하라”라는 요구를 보편적 인권 언어로 번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디언의 자기결정권은 점점 더 국제 인권 담론과도 연결되었다.
우운디드 니 이후 인디언 권리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자결과 자기통치라는 언어 속에서 구체적인 법 조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빛과 그림자, AIM과 인디언 권리 운동의 복잡한 유산
AIM과 레드 파워 운동의 유산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다. 일부 활동가는 이후 내부 폭력 사건과 여성 혐오, 권력 남용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연방 수사기관의 장기적인 감시와 정보 공작, 보호구역 내 정치 갈등이 맞물리면서, 1970년대 후반 인디언 운동 내부는 피로와 불신으로 흔들렸다. 어떤 이들에게 우운디드 니는 해방의 상징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끝나지 않는 분열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디언 공동체는 AIM이 만들어 낸 문화 부흥과 자긍심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도시와 보호구역 곳곳에서 인디언 학교와 문화 센터, 건강 클리닉이 세워졌고, 전통 언어·춤·의례를 되살리려는 프로그램이 꾸준히 이어졌다. 오늘날 젊은 인디언 활동가와 예술가 상당수는 “AIM의 세대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숨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우운디드 니의 사진과 기록은 미국 내부에서만 소비되지 않았다. 이후 전 세계의 토착민 운동과 인권 단체들은 우운디드 니를 참고 사례로 언급해 왔다. 뉴질랜드 마오리의 토지 투쟁, 캐나다 퍼스트 네이션의 파이프라인 반대 운동, 남미 원주민의 산림 보호 투쟁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레드 파워 이후의 세계”에서 연결된 장면들이다.
AIM의 모순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우운디드 니는 전 세계 토착민 운동이 서로를 발견하는 좌표가 되었다.
인디언이 바꾼 세계사, 인권·정치사의 한 축으로 남다
체로키의 눈물의 길, 1838년 강제 이주가 영토와 조약을 깨뜨린 19세기 국가 폭력을 보여 주고, 나바호 코드 토커, 태평양 전쟁을 바꾼 언어가 억압받던 언어가 전쟁과 기술의 방향을 바꾼 장면을 보여 주며, 버팔로가 사라진 날, 대평원의 질서가 무너진 이유가 생태와 경제, 건강 격차의 뒤집힌 운명을 드러내고, 스탠딩 록과 석유 파이프라인, 21세기 인디언의 토지·환경 투쟁이 기후와 에너지 전환 논쟁 속 인디언의 현재진행형 싸움을 보여 준다면, 우운디드 니 점거는 그 모든 서사가 20세기 인권·정치사 속에서 하나의 축으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학살의 기억과 레드 파워, 법과 제도의 변화를 한꺼번에 품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운디드 니에서 AIM과 오글라 활동가들이 요구한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비교적 단순했다. 조약을 지키라, 빈곤과 폭력을 멈추라, 인디언이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게 하라. 이 요구는 이후 인디언 자결·교육 지원법과 종교 자유, 아동 복지법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유엔의 토착민 권리 선언과 각국 헌법·법률 논의의 기초가 되었다. “누가 이 땅에서 결정권을 갖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앞선 네 편의 이야기와 이번 글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인디언 역사는 단지 미국 서부 영화의 배경이 아니라, 근대 국가와 제국, 냉전, 인권 운동, 기후 위기와 에너지 전환까지 이어지는 여러 축을 관통하는 서사임이 드러난다. 인디언이 바꾼 세계사는, 결국 “누가 역사와 영토, 미래를 정의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오늘의 독자에게 돌아온다.
우운디드 니 이후 인디언의 투쟁은, 20세기 인권·정치사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묻는 하나의 기준선으로 남아 있다.
참고·출처
우운디드 니 점거와 레드 파워 운동에 관한 기본 사실은 미국 국립공문서관리청과 미 연방 보안관국, 타임·히스토리 등에서 제공하는 사건 개요 자료, 그리고 우운디드 니 점거를 다룬 역사 연구·저널 논문들을 참고해 정리했다. 아메리칸 인디언 무브먼트의 탄생과 목표, 도시 인디언 운동의 배경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미네소타 역사학회 자료를, 인디언 민권법과 인디언 자결·교육 지원법, 인디언 종교 자유법·아동 복지법 등 주요 법제 변화는 미국 의회 기록과 연방 정부 해설 자료를 바탕으로 요약했다. 세부 연도와 법률 번호, 인물 이름은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선별해 사용했다.
'역사 > 아메리카 인디언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디언 보호구역,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 (0) | 2025.11.18 |
|---|---|
| 인디언이 바꾼 세계사 ④ 스탠딩 록과 석유 파이프라인, 21세기 인디언의 토지·환경 투쟁 (0) | 2025.11.18 |
| 인디언이 바꾼 세계사 ③ 버팔로가 사라진 날, 대평원의 질서가 무너진 이유 (0) | 2025.11.18 |
| 인디언이 바꾼 세계사 ② 나바호 코드 토커, 태평양 전쟁을 바꾼 언어 (0) | 2025.11.18 |
| 인디언이 바꾼 세계사 ① 체로키의 눈물의 길, 1838년 강제 이주 (0) | 2025.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