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이 바꾼 세계사 ① 체로키의 눈물의 길, 1838년 강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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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키의 눈물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형 역사로 남아 있다.

1838년 미국 정부는 인디언 이주법을 앞세워 약 1만 6천 명의 체로키를 강제로 서쪽으로 내몰았다. 애팔래치아에서 오클라호마까지 이어진 눈물의 길에서 약 4천 명이 쓰러졌고, 이 비극은 오늘날까지 미국 민주주의의 그늘을 비추는 거울로 남아 있다.

최종 업데이트 2025-11-18

읽기 경로·예상 소요 체로키의 영토와 배경 → 인디언 이주법과 판결 → 1838~1839년 강제 행군 → 탈레콰와 동부 체로키의 재건 → 기억과 관광·오늘의 쟁점 → 민주주의와 법을 돌아보는 결론 순으로 읽으면 약 13~17분이 걸린다.

인디언이 바꾼 세계사 시리즈 한 번에 보기

체로키의 눈물의 길, 1838년 강제 이주 · ② 나바호 코드 토커, 태평양 전쟁을 바꾼 언어 · ③ 버팔로가 사라진 날, 대평원의 질서가 무너진 이유 · ④ 스탠딩 록과 석유 파이프라인, 21세기 인디언의 토지·환경 투쟁 · ⑤ 우운디드 니 점거 이후 인디언 권리 운동, 20세기 인권·정치사의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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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키의 땅, 애팔래치아에서 오클라호마까지

‘진정한 사람들’을 뜻하는 아니 윤위야(ᎠᏂᏴᏫᏯ)는 태고부터 애팔래치아 산맥 남쪽, 오늘날 조지아·테네시·노스캐롤라이나·사우스캐롤라이나 일대에 넓게 퍼져 살았다. 산과 숲, 강과 계곡이 어우러진 이 지역에서 체로키는 옥수수와 콩, 호박을 재배하고 사냥과 채집을 병행하며 촘촘한 마을 공동체를 이루었다. 18세기 후반까지도 이 땅은 체로키의 조상 묘가 있는 성스러운 공간이자, 전쟁과 의례, 정치가 모두 얽힌 생활권이었다.

18세기 말부터 미국이 독립 국가로 자리 잡아 가면서 상황은 급격히 바뀌었다. 애팔래치아 서쪽으로 밀려드는 백인 농부와 상인들, 주 정부의 토지 투기 세력, 연방 정부의 군대가 동시에 압력을 가했다. 체로키는 전면전을 택하기보다, 일부 영토를 내주고 새로운 방식으로 생존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체로키는 문자·학교·헌법을 도입해 스스로를 ‘문명화된 부족’으로 재정의하며 미국의 한 구성원으로 남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 남부에서는 면화와 금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체로키의 존재를 점점 더 거슬리게 만들었다. 특히 조지아 주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체로키의 땅은 더 이상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꼭 빼앗아야 할 대상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체로키가 아무리 미국식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발행해도, 땅을 원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문명화는 보호막이 되지 못했다.

체로키라는 민족 전체의 역사와 사회 구조는 별도의 글인 체로키, 잊혀지지 않는 여정에서 보다 넓은 시간대 속에서 정리했다. 이 글은 그 가운데서도 1838년 강제 이주, 이른바 눈물의 길에 초점을 맞춘다.

애팔래치아의 체로키 영토는 협상의 대상에서 강탈의 대상으로 바뀌며 비극의 서막을 열었다.

인디언 이주법과 무시된 판결, 법이 멈춘 자리

1830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에 서명했다. 겉으로는 미시시피 강 동쪽의 원주민을 서쪽으로 ‘자발적으로’ 옮기고, 그 대가로 새 영토를 보장한다는 법이었지만, 실제로는 군대와 행정력을 동원한 강제 이주의 길을 여는 조치였다. 체로키 지도부는 이 법에 맞서 외교와 소송을 병행하며 버텼다.

체로키는 연방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1832년 ‘워체스터 대 조지아(Worcester v. Georgia)’ 판결에서 연방 대법원은 체로키의 영토 주권을 인정하는 쪽에 섰다. 대법원장 존 마셜의 판결은 주 정부가 체로키 영토에서 마음대로 법을 집행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조지아 주는 판결을 무시했고, 잭슨 대통령은 사실상 방관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법정에서의 승리는 현실의 힘을 바꾸지 못했다. 일부 체로키 지도자들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조용히 이주 조약을 체결하자고 주장했고, 다른 지도자들은 끝까지 고향을 지켜야 한다며 격렬히 반대했다. 1835년 체결된 ‘뉴이코타 조약’은 체로키 내부의 충분한 동의를 얻지 못한 채 소수 지도자들의 서명으로 체결됐고, 연방 정부는 이를 전체 체로키와 맺은 합법적 조약으로 간주했다. 이후의 강제 이주는 사실상 이 조약을 근거로 집행되었다.

인디언 이주법과 대법원 판결, 뉴이코타 조약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한 나라의 법과 민주주의가 경제적 이해와 인종적 편견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력화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체로키의 눈에서 보면, 법은 약자를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강자의 도장을 합법으로 포장하는 도구로 변해 있었다.

체로키의 강제 이주는 법이 있었음에도 집행되지 못한, 민주주의 실패의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1838~1839년 눈물의 길, 숫자로 본 강제 행군

1838년 봄부터 연방군과 주 방위군은 체로키 마을 곳곳을 급습했다. 군인들은 집과 밭에서 사람들을 끌어내어 임시 수용소로 몰아넣었다.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졌고, 노인과 환자들은 준비 없이 길에 올랐다. 체로키는 거의 아무 짐도 챙기지 못한 채, 훈련되지 않은 군대의 호송 아래 미시시피 강을 건너 서부의 ‘인디언 준주’로 옮겨졌다.

역사학자들은 약 1만 6천 명의 체로키가 이주 대상이었고, 그중 대략 4분의 1에 해당하는 4천 명 안팎이 여정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한다. 추운 계절에 시작된 행군, 불충분한 식량과 의복, 콜레라와 홍역, 폐렴 같은 질병이 겹치면서 매일 수십 구의 시신이 길가에 묻혔다. 시대와 연구에 따라 구체적인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체로키의 구술 기록과 가족들의 기억은 “하루도 죽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눈물의 길은 하나의 직선로가 아니었다. 여러 무리가 서로 다른 경로로 이동했고, 강을 배로 건너거나 얼어붙은 도로를 수주 동안 걸어야 했다. 일부는 민간 상인의 배를 이용했지만, 빚을 갚지 못해 더 열악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 산모와 유아, 노약자는 강행군을 견디지 못했고, 가족들은 얼어붙은 강변이나 숲길 옆에 급히 무덤을 파고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 했다.

이 행군에는 군인뿐 아니라 상인과 계약업자들도 얽혀 있었다. 정부는 민간 계약자에게 이주를 맡기고 인원수에 따라 비용을 지불했는데, 비용을 아끼려는 계약자들이 열악한 식량과 운송 수단을 제공한 탓에 피해는 더 커졌다. 숫자로만 보면 행정 절차였지만, 현장에서 체로키가 경험한 것은 굶주림과 질병, 폭력과 상실이 뒤섞인 생지옥에 가까웠다.

눈물의 길은 1만 6천 명 중 약 4천 명이 쓰러진 집단 강제 행군으로, 행정 절차라는 이름의 폭력이었다.

탈레콰의 재건과 동부 체로키, 두 개의 고향

눈물의 길을 살아남은 체로키는 오클라호마 북동부에 새 수도 탈레콰(Tahlequah)를 세웠다. 이곳에서 체로키는 다시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했으며,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신문 발행을 재개했다. 문자와 교육, 자치 제도는 잃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기반으로 여겨졌고, 많은 이들이 전쟁과 이주의 상처를 안은 채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힘을 쏟았다.

한편 모든 체로키가 서쪽으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애팔래치아의 험한 산지로 숨어들어 군대의 추적을 피했다. 이들은 수십 년 동안 눈에 띄지 않게 농사와 수렵으로 살아남았고, 이후 연방 정부의 인정을 받아 노스캐롤라이나 일대의 ‘동부 체로키 인디언 부족(Eastern Band of Cherokee Indians)’으로 남게 되었다. 같은 언어·문화·조상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영토와 법적 지위를 갖게 된 셈이다.

오늘날 미국에는 여러 체로키 관련 부족과 단체가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오클라호마의 체로키 네이션과 동부 체로키는 눈물의 길 이후 공식적인 법적 지위를 인정받은 공동체로 평가된다. 두 공동체 모두 학교와 박물관, 문화 행사를 통해 강제 이주의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있으며, 언어와 춤, 전통 의례를 되살리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체로키의 심장은 서부의 탈레콰와 동부의 애팔래치아 산지 두 곳에서 뛴다. 눈물의 길이 하나의 공동체를 두 개의 고향으로 갈라놓았지만, 체로키에게 두 땅은 모두 조상과 후손을 잇는 중요한 기억의 장소로 남아 있다.

눈물의 길 이후 체로키의 심장은 탈레콰와 애팔래치아 두 곳에서 뛰며, 상실과 재건의 역사를 동시에 품고 있다.

기억과 관광 사이, 오늘도 이어지는 눈물의 길

20세기 후반 이후 미국 사회는 눈물의 길을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국가 폭력과 인종차별의 역사로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부 구간은 국립 역사 공원과 주립 공원으로 지정됐고, 기념비와 해설 패널이 세워졌다. 매년 체로키 후손과 시민단체, 학생들이 참여하는 추모 행진과 교육 프로그램이 열리며, 행군 경로를 따라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하며 조상의 고통을 되새기는 행사가 이어진다.

동시에 눈물의 길은 관광 산업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버스 투어와 역사 체험 상품, 기념품 가게가 늘어났고, 어떤 곳에서는 비극의 현장이 ‘체험형 역사 관광지’처럼 소비되기도 한다. 체로키 내부에서도 이런 상업화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기억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일정 수준의 관광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과, 슬픔의 장소가 또 하나의 기념품 사진 배경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긴장 관계를 이룬다.

눈물의 길을 둘러싼 오늘의 쟁점은 단지 과거를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에 그치지 않는다. 석유와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이나 대형 개발 사업이 체로키와 다른 부족의 조상 묘지를 침범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땅과 유해, 성지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가 현재진행형 과제가 되었다. 눈물의 길을 기억하는 일은 곧, 다시는 같은 방식의 강제 이주와 파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체로키에게 눈물의 길은 끝난 과거가 아니라, 학교 교실과 가정의 식탁, 추모 행진과 법정 투쟁에서 매일 다시 불리는 이야기다. 강제 이주로 쓰러진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내고, 그들의 땅과 언어, 공동체를 지키려는 노력 속에서 비극의 역사는 조금씩 다른 미래를 향해 다시 쓰이고 있다.

눈물의 길은 기념비와 관광지를 넘어, 땅과 기억을 지키려는 오늘의 투쟁 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체로키의 눈물, 누구의 역사로 남을 것인가

체로키의 강제 이주는 한 부족의 비극을 넘어, 미국이라는 국가가 스스로 내세운 가치와 얼마나 모순된 행동을 했는지 보여 주는 거울이다. 인디언 이주법과 대법원 판결, 눈물의 길과 탈레콰 재건까지 이어지는 서사에는, 법과 민주주의가 힘을 가진 다수의 이해관계 앞에서 어떻게 흔들리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도 공동체가 존엄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동시에 담겨 있다.

오늘날 눈물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단지 체로키의 옛 이야기를 되짚는 것이 아니다. 강제 이주와 토지 수탈, 인종차별과 개발 논리에 맞서 싸우는 현재의 수많은 현장과 이 길을 겹쳐 본다. 애팔래치아의 숲에서 시작된 체로키의 여정은 결국 “누가 이 땅의 진짜 주인인가, 누구의 역사만 교과서에 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눈물의 길이 더 이상 새로운 희생자를 낳지 않는 길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잘못을 기록하고 가르치는 일, 조약과 판결을 존중하는 법치, 그리고 원주민 공동체의 목소리를 정치와 경제 결정 과정에 실질적으로 반영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체로키의 눈물이 더 이상 침묵 속에 마르지 않도록 만드는 일은, 이 역사를 공유하는 모두의 과제로 남아 있다.

체로키의 눈물의 길을 기억하는 일은, 법과 민주주의가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참고·출처

체로키의 강제 이주와 눈물의 길에 대한 내용은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이 제공하는 트레일 오브 티어스 국립 역사 트레일 자료, 체로키 네이션과 동부 체로키 인디언 부족의 공식 역사 소개, 미국 원주민사를 다룬 역사학 연구서를 종합해 정리한 것이다. 숫자와 연도, 주요 인물과 지명 등은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서술했고, 논쟁이 남아 있는 세부 해석과 계보 논쟁은 신중하게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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